김금숙 ㅣ 그래픽노블 작가
지난겨울, 눈 빠지게 눈을 기다렸다. 눈 같지 않은 눈이 한번 오더니 겨울은 시시하게 지나가 버렸다.
봄은 애벌레로 가득했다. 한동네에 사는 ‘콜리’(강아지) 주인은 젓가락으로 꽃나무에서 “아휴, 징그러워” 하며 애벌레를 잡았다. 우리 집 마당에도 바글바글했다. 어떤 것은 너무 커서 소름이 돋았다. 나뭇가지 두개를 젓가락처럼 잘랐다. 단풍 사이에서 꿈틀대는 애벌레들을 잡아 땅에 내팽개쳤다. 신발로 지끈 밟았다. 녹색 피가 터졌다. 죄책감과 동시에 징그러움에 나도 몰래 “아으”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웃집 아주머니는 그렇게 해서 언제 애벌레를 잡느냐고 약을 쳐야 한다고 했다. 집 근처에 있는 ‘큰 나무 카페’에 가던 책방 ‘국자와 주걱’ 점장이 우리 집 앞을 지나다가 그런 내 모습을 보았다. “뭐 해?” “아휴, 언니, 약을 쳐야 할까 봐요.” 내 말에 그는 약을 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연이 다 알아서 한다고 했다. 나는 일단은 내버려두기로 했다. 생태계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약을 뿌리면 반려견 ‘당근이’와 ‘감자’가 혹시나 나뭇잎, 풀을 뜯어 먹고 아플까 봐 두려워서였다. 벌레 가득한 나무와 꽃들은 예상보다 빨리 병들어 죽어갔다. 장미꽃은 피지도 못하고 봉오리째 누렇게 변했다.
여름이 오고 어느 날부터 갈색 나방이 눈에 띄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하얀 나비는 보기라도 예쁘다. 갈색 나방은 보기도 흉측하거니와 그 수도 많았다. 햇살이 강하게 테라스를 비췄다. 웰시, 코기, 당근이는 더워서 마당에 나가기보다는 시원한 마루에 누워 잤다. 감자는 본능적으로 사냥하는 성질이 있는가 테라스에서 나방을 쫓아다녔다. 감자의 발은 빨랐다. 움직이는 것은 잘 잡는 편이었는데도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감자는 미친 듯이 나방을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당연히 잡을 수가 없었다. 나방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방은 감자의 머리 위로 유유자적 날았다. “감자야, 머리 위를 봐. 나방은 네 머리 위에 있어.” 아무리 말을 해도 감자는 나방의 그림자만을 쫓았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미대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홍대 앞에 있던 미술학원에 갔다. 또래 친구들은 이미 2, 3년째 미술학원을 다녔기 때문에 입이 떡 벌어지게 석고상을 잘 그렸다. 처음 가니까 선생님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또 사선으로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선긋기만 시켰다. 선긋기 과정이 끝나니 석고로 만든 입체 도형을 그리라고 했다. 명암을 이해하고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후 각진 아그리파 조각상을 거쳐 부드러운 아그리파상 그리는 연습을 했다. 선생님은 내 선에 주저함이 없고 힘이 있다고 했다. 그림이 금방 늘 스타일이라고도 했다. 문제는 내가 그린 아그리파 석고상의 형태가 매번 정확하지 않았다. 보이는 대로 형태를 잡았기 때문이다. “눈은 우리를 속인다”라고 선생님은 내게 눈으로 재지 말고 연필로 재서 그리라고 했다.
혼돈스러웠다. 보는 것을 믿지 말라니. 내가 보는 저 하늘의 파란색이 파란색이 아니고 노란 바나나가 노란색이 아니라고? 다른 친구들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 내게는 청개구리 성격이 있다. 가지 말라고 하면 가고 싶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다. 내 안의 반항심이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도 싶었다. 한편으로는 감각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연필로 재지 않고도 정확히 그리는 감각 말이다. 대학은 가야 했다. 멋지고 개성 있는 그림보다는 정확한 형태와 구도, 입체감이 중요했다. 내 부질없는 반항심은 대학 입학을 위해서 깨끗이 포기해야 했다.
오후의 햇살이 테라스에 긴 그림자를 만든다. 감자는 여전히 그림자를 쫓고 있고 나는 큰 소나무 아래 앉아 있다. 나무 아래 있으니 아무리 멋진 나무여도 나무를 볼 수가 없구나. 적당한 거리에서 보이는 옆집 소나무는 훨씬 작지만 그 모양과 색을 볼 수가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나무이고 적당한 거리에 있어도 또한 마음이 없으면 보지 못하리라.
내가 석고상을 눈으로 측정한 것이 정확하지 않았듯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언젠가 그것을 깨달았다고 해도 남의 눈이 신경 쓰이고 내가 그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모른 척할 수도 있다. 마음의 문제다.
나도 혹시 감자 같지는 않을까? 인간에게 나방은 무엇이며 그림자는 무엇일까? 명예인가? 성공인가? 돈? 명성? 야망? 나방을 잡으려면 고개를 들어야 하고, 숲을 보려면 내 숲에서 나와야 한다. 당신도 혹시 그림자를 쫓고 있지는 않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