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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젠더 프리즘] 지독했던 2차 피해의 기억 / 이정연

등록 2020-08-09 17:42수정 2020-12-02 11:44

이정연 ㅣ 소통젠더데스크

박원순 전 시장이 숨진 지 한 달이 넘었다. 그 뒤 지금 한반도에 내리는 비만큼이나 많은 말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강이 하나 생겼다. 그가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피해자의 주장을 믿을 수 없는 사람과 믿는 사람 사이에 깊고 넓은 강이 흐른다.

<한겨레>는 한국기자협회와 여성가족부가 함께 만든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과 ‘성폭력·성희롱 사건보도 공감기준 및 실천요강’ 등을 지키려 노력하며 관련 기사를 쓰고, 제목을 달고자 했다. “성폭력·성희롱은 피해자가 원치 않는 성적 언동으로 ‘성적 자기결정권’ 및 인격을 침해당한 심각한 인권침해 문제로 바라보고 언론은 사건을 보도하여야 한다”는 부분을 몇 번이나 읽고, 곱씹었다. 이런 피해자 관점의 보도를 이어가는 와중 <한겨레>는 왜 박원순 전 시장을 가해자로 여기느냐는 독자의 항의를 많이 받았다. 깊고 넓은 말의 강의 수위는 내려갈 줄 몰랐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꺼내놓아야겠다 결심했다. 강의 폭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까 싶어서, 어쩌면 양쪽의 사람들이 마침내 강을 건너 만나 함께 손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2013년 말, 한 고위 검사가 나를 성추행했다(구체적으로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는 적지 않겠다. 어디를 어떻게 만졌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회사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제기하고 법적 대응까지 나설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응원을 해줬고, 지지했다. 그러나 법적 대응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가해자를 고소했지만 1년10개월 만에 검찰은 무혐의 처분 결정을 내렸다. 이 처분이 있기 하루 전날 ‘시민위원회’를 열었고, 그 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불기소 의견을 냈다고 검찰 쪽은 설명했다.

이 사건이 이렇게 마무리되기까지 1년11개월이 걸렸다. 응원과 지지를 받았지만, 수없이 많은 공격에도 노출되어야 했다. 가장 심각한 2차 피해는 검찰 내부와 몇몇 기자 동료들의 입에서 나왔다. “그분이 그럴 분이 아닌데…”, “기자가 너무 예민했던 거 아니야?”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다른 기자들과 나눈다는 걸 알게 됐다.

형사 고소의 결과가 무혐의로 끝난 뒤 2차 피해를 준 말들이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다. 그렇다면 나는 피해자가 아닌가? 가해자는 정말 “그럴 분이 아닌” 건가? 다행스럽게도 당시 검찰의 무혐의 처분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 시민과 독자들이 많았다. 가해자의 행위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피해자에게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응원과 지지의 목소리는 잊기 쉬웠고, 2차 피해의 말들은 뇌리에 더욱 깊게 박혔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미투 운동과 ○○계 성폭력 반대 운동이 이어졌다. 하나의 사건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옆에서 보고 때로는 함께했다. 대중의 관심이 컸던 만큼 수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피해자 관점의 보도와 2차 피해 방지가 하나의 상식선이 되어갔다. 앞서 소개한 ‘성폭력·성희롱 사건보도 공감기준 및 실천요강’은 미투 운동이 있던 2018년에 만들었다. 이렇게 피해자로 섰던 경험과 미투 운동을 거치며 작디작은 희망이나마 생겼다고 여겼다. 언론계 그리고 시민들의 성인지 감수성은 더디나마 우상향하리라는 기대를 하게 됐다.

그 기대를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지금 기대가 흔들린다.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는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잦아드니 2차 피해가 더 심각해지는 양상이다. 박 전 시장의 옹호자들은 자신의 강력한 발언권을 발휘해 피해자와 그 연대자를 비난하는 데 몰두한다. 우리 사회의 성인지 감수성이 우상향하리라는 기대가 자꾸 꺾이는 느낌이다. 피해자 관점의 보도를 지향하고, 2차 피해를 지양하는 것. 이제 ‘상식’이 아니던가. 유별난 주장이 아니다. 그 상식이 피해자와 그 반대편에 선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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