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보라 ㅣ 영화감독·작가
얼마 전 김원영 변호사의 책 <희망 대신 욕망>(2019)을 읽었다. 장애가 있는 몸과 함께 살아가며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이 책은 저자의 장애해방서사를 다룬다.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썼으니 눈물 펑펑 쏟겠지, 생각하고 읽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는 “우리는 누가 뭐래도 장애인이다. 그 어떤 낙인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은 장애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장애를 극복하려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장애로 인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라고 말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저자가 재활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느려터진 쟤보다는 나은 장애인이라며 현실을 부정한다. 그러나 곧 깨닫는다. 창의적으로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느려터진 쟤보다 나는 못하는 게 훨씬 많다는 걸. 저자는 장애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기술한다. “그렇다. 나는 장애인이 맞다. 그러나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과 ‘나는 장애인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고 말하고 외치고 쓰기까지의 과정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책을 읽으며 내가 썼던 책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5)를 떠올렸다. 입술 대신 수어로 말하는 부모 아래서 자란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의 약자)로서의 경험을 담은 책이다. 그 책 역시 장애해방서사를 다룬다. 부모가 손상과 결여의 의미로서의 청각장애인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수화언어와 농문화를 지닌 사람이라는 걸, 풍성한 문화 속에서 자란 것이라는 걸 인정하자 더 큰 세상이 펼쳐졌다고 말하는 책이다. 이 책을 쓰기 전, 동명의 영화를 만들기 전에 더 많은 장애해방서적을 읽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농인 부모의 자녀로 자라면서 장애학은커녕 장애해방서사는 거의 접한 적이 없다. 장애는 극복해야 하는 것이었고 장애인은 도움이 필요한 존재였다. 비장애인들은 미성년자인 내게 매일같이 “부모를 잘 보살펴야 한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성인인 부모에게 통역해야 했다. 책과 티브이를 비롯한 매체에서는 불쌍한 장애인이 나왔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렇게 힘겹게 사는데 우리도 열심히 살자.” 정말이지 지겨웠다. 어딜 가나 장애극복서사가 넘쳐났다. 조금 외로웠다. 우리 부모는 나 없이도 살아왔는데, 나 없이 장도 보고 돈도 버는데, 도대체 왜. 이유를 알 수 없어 헤매었다. 질문을 가지고 여행을 했고 영화를 만들고 책을 썼다. 경험을 통해 사유했다. 부모의 장애를 긍정하고 그것이 언어와 문화라는 걸 깨닫고 더 나아가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이 라벨을 떼는 일이라고, 장애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몇십년의 몸의 경험을 필요로 했다. 장애해방서적을 일찍 접했더라면 나는 다른 사유와 고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조금 더 빨리 해방될 수 있지 않았을까.
지난 10일, 국회 의사 중계의 수어통역, 자막, 화면해설 등을 의무화하는 국회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한국방송>(KBS) ‘9시 뉴스’에서도 지상파 방송사 중 최초로 메인 뉴스에서 수어통역을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무척 환영할 일이다. 형식이 만들어졌으니 다음은 통역의 질을 높이는 것이어야 할 테다. 존 맥나이트는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을 때 혁명은 시작된다”고 말했다. 나의 부모는 이제야 당신의 언어로 뉴스와 국회 기자회견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장애인이라는 꼬리표를 스스로 떼거나 재정립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붙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엄마, 아빠가 직접 당신의 장애해방서사를 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궁금하다. 당신이 말하는 장애해방, 농인의 눈으로 본 청인들의 비장애인 중심 사회. “나는 이 글들을 자유와 연대의 힘을 증언하기 위해 썼다”는 김원영 변호사의 말을 떠올린다. 외롭게 썼던 나의 장애해방서사도 떠올린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만 몰랐을 뿐이다. 자유와 연대의 힘으로 이어온 장애해방운동과 장애해방서사 위에 서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