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ㅣ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여럿이 마구 섞여 엉망이 된 상태. 요 며칠 사이 가장 많이 떠오른 단어. ‘엉망진창, 뒤범벅, 난장판’이란 말이 함께 떠돈다. 장마는 눈앞의 살림살이와 논밭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하늘뜻을 잃은 사람들의 패악질은 사람들의 정신줄을 헝클어뜨렸다. 허탈과 분노.
말에는 이런 뒤죽박죽이 제한적으로 허용되기도 한다. ‘쏟아지는 빗물과 튀어 오른 흙탕물로 온 동네가 엉진망창이 되어 있었다.’ 잘 읽었는가? 사람들은 글을 읽을 때 단어를 이루는 글자들을 하나하나씩 읽지 않고 한 덩어리로 읽는다. 철자가 비슷하기만 하면 아는 단어로 보고 다음 말로 넘어간다. 뒤에 흠집이 조금 있어도 눈치를 못 챈다. 글줄깨나 읽은 사람들이 더 그런다. 아는 단어일수록 더 잘 속는다. 판에 박힌 생각이 변화를 못 알아차리는 법.
외국여행 후기에 곧이곧대로 비판글을 올리기 뭣할 때 이런 방법을 쓴다고 한다. ‘카이펫랑 화실장에 바벌퀴레 엄나청게 나니옵다’라는 식이다. 첫 글자와 끝 글자는 놔두고 그 사이에 있는 글자를 뒤섞었는데 얼추 읽어낼 수 있다. 말소리를 음절 단위로 모아써서 가능한 놀이이다. 번역기를 돌려도 알 수 없던 외국인 집주인은 예약이 끊긴다거나 하는 뒤통수를 맞는다.
우리는 세상을 현미경처럼 보지 않고 어림짐작과 넘겨짚기로 바라본다. 전체 흐름과 맥락 속에 개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거나 추론한다. 거리두기로 우리가 맺어왔던 관계를 재음미하고 타인을 향한 연민과 그리움이야말로 사람다움의 길이란 걸 알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반칙자들이 쑥 들어왔다. 하나 이들도 ‘뒤박죽죽’ 우리 이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