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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파원 칼럼] 표백된 역사-위안랑에서 / 정인환

등록 2020-08-27 17:13수정 2020-08-28 02:39

정인환 ㅣ 베이징 특파원

은폐된 진실은 거짓으로 되살아난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다. 홍콩판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시행으로 승리감에 취한 걸까? 홍콩 경찰이 역사를 다시 쓰려는 모양새다.

홍콩 신계지역 위안랑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된 것은 지난해 7월21일 초저녁부터다. 도심에서 송환법 반대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 쪽에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위안랑 전철역에서 내리지 말라”는 경고가 공유됐다. 이날 밤 10시30분께 흰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100여명의 괴한이 위안랑역 내부로 진입했다. 쇠막대와 몽둥이로 무장한 이들은 시위대를 상징하는 검은 옷을 입은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기 시작했다. 유혈이 낭자한 현장에서 임산부를 포함해 45명이 병원으로 옮겨졌다. 명백한 ‘백색 테러’였다.

‘999’ 긴급 전화로 신고가 빗발쳤다. 경찰 2명이 처음 현장에 도착한 것은 사건 당일 밤 10시57분께였다. 하지만 이들은 병력 지원만 요청한 뒤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경찰 30여명이 추가로 현장에 도착한 밤 11시15분께는 이미 폭력 사태가 일단락된 뒤였다. 당시 경찰은 “흰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론 체포할 수 없다”며, 용의자들이 현장을 빠져나가는 걸 방치했다. ‘경찰-폭력배 유착설’이 번졌다.

‘7·21 위안랑 백색 테러’는 송환법 반대 시위에 기름을 부었다. 이후 매달 21일이면 위안랑에서 규탄 집회가 이어졌다. 경찰은 뒤늦게 당일 폭력 사태에 개입한 혐의로 조직폭력배를 포함해 수십명을 체포했다. 하지만 독립조사위원회를 꾸려 진상을 밝히라는 시민들의 요구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건의 진상은 지금껏 철저히 가려져 있다.

“편향적이고, 왜곡됐으며, 여론을 호도하는 거짓 정보로 가득 차 있다.” 홍콩 경찰은 26일 기자회견을 열어 위안랑 테러에 대한 언론의 보도를 이렇게 규정했다고 <홍콩방송>은 전했다. 늑장 대응이란 비판도, 경찰의 연루설도 일축했다. 그리고 위안랑 사건에 대한 ‘재해석’을 내놨다.

“흰옷을 입은 괴한들이 일방적으로 저지른 무차별 폭행 사건이 아니다. 흰옷을 입은 괴한과 시위대 간에 벌어진 ‘쌍방 폭행’ 사건에 해당한다.”

앞서 홍콩 경찰은 이날 오전 6시께 야당인 민주당 소속 현역 입법의원 2명을 자택에서 체포했다. 테드 후이 의원은 지난해 7월6일 신계 지역 툰먼경찰서 앞 불법시위 혐의를, 람 척팅 의원은 위안랑 사건 당시 폭력을 부추긴 혐의를 받고 있다. 후이 의원은 툰먼경찰서 앞 시위 당시 시위대와 경찰의 중재를 위해 현장으로 달려갔다. 람 의원은 위안랑 사건 당시 폭력 사태를 막으려다 부상을 당한 바 있다. 두 의원은 그간 입법회에서 위안랑 사건 진상규명 노력에 앞장서왔다.

“사슴을 말이라 하는 것과 같다.” 우치와이 민주당 주석은 두 의원 체포에 대해 “명백한 정치적 보복이자, 역사를 표백하려는 시도”라고 지적했다. 클로디아 모 의원은 “오늘 경찰은 정치적 성명을 내놨다. ‘우리가 맞다. 우리가 법이다. 우리가 보기에 당신이 범죄자 같으면, 당신을 체포할 것이다. 특별한 근거가 필요한 건 아니다. (…) 우리가 법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반면 친중파 허쥔야오 입법의원은 “늦은 감은 있지만, 홍콩을 올바른 길로 되돌리기 위한 조처”라며 환영했다. 그는 입법회 민주파를 겨냥해 “홍콩에 더 이상 ‘썩은 살’은 필요 없다. 이제는 ‘죽은 고기’를 제거할 때가 됐다”고도 했다. 법률가 출신인 허 의원은 위안랑 사건 당시 현장에서 ‘흰옷 괴한’들과 웃으며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공개돼 논란이 된 바 있다.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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