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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강준만 칼럼] 민주주의는 겸손을 먹고 산다

등록 2020-08-31 04:59수정 2020-08-31 08:25

권력을 쥔 사람들이 악한 게 아니다. 인간인 이상 권력을 쓰는 사람 자체가 완벽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완벽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를 권력 스스로 단죄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자신들은 ‘선한 권력’이기 때문에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자기 보호’가 필요하며, 따라서 권력을 어느 정도 오·남용하는 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강준만

“갈등이 더욱 깊어질수록 이 갈등의 뿌리에 관한 분명하고 정리된 견해를 얻기 위하여 추상의 수준을 높일 수밖에 없다.” 미국 철학자 존 롤스의 말이다.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늘 싸움의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는 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잘 알겠지만, 피상적 수준에서 아무리 공방을 벌여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그 이유의 ‘뿌리’에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싸움도 그렇지 않을까? 나는 이 싸움의 뿌리가 상당 부분 권력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권력관에 있다고 생각한다. 추상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 권력관에 관한 논의를 먼저 하는 것이 싸움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른바 ‘선한 권력’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는 이상 권력의 지배나 통치가 없는 세상은 존재하기 어렵다. 물론 그런 세상을 꿈꾸는 주장과 이론들이 적잖이 나왔지만, 아직 꿈으로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바라는 건 ‘선한 권력’이지만, 권력 주체가 스스로 ‘선한 권력’임을 내세우는 건 매우 위험하다. 이른바 ‘내로남불’과 ‘남 탓’의 상례화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악한 권력’을 전제로 해서 생겨난 시스템이다. 권력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할 것을 요구한다. 3권 분립을 통한 상호 견제와 감시가 바로 그런 ‘의심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절차로 인해 능률과 효율은 크게 떨어지지만, 그런 비용을 부담하는 게 권력의 오·남용이 대규모로 저질러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게 민주주의 체제에 사는 사람들의 암묵적 합의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악한 게 아니다. 인간인 이상 권력을 쓰는 사람 자체가 완벽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완벽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를 권력 스스로 단죄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권력의 1차적 목적은 ‘자기 보호’다. 자신들은 ‘선한 권력’이기 때문에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자기 보호’가 필요하며, 따라서 권력을 어느 정도 오·남용하는 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타락하고 몰락한 ‘선한 권력’들이 인류 역사엔 무수히 많다. “권력을 쥐면 사람의 뇌가 바뀐다”는 말은 진실에 가깝다. “권력은 부패하며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 이런 부패의 과정은 권력자 스스로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눈에 보이지 않게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이야말로 그 모든 혁명이 실패하는 원인이다”라고 했다. 개혁도 다를 게 없다. 개혁을 위해선 ‘적폐 청산’을 해야 한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치명적인 난관이 하나 있다. 구조의 문제일 수 있는 적폐를 의인화·개인화해 사람 중심으로 청산하다 보면 일상의 영역에선 사실상 ‘우리 편 일자리 만들어주기’라는 ‘밥그릇 쟁탈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개혁을 추진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개혁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보다 더 선하고 정의로운 세계관을 갖고 있는지는 몰라도 자녀교육에서부터 부동산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선 다를 게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선과 정의에 목숨을 건 듯한 과장된 수사법을 구사하는데, 그럴수록 일상에서 그들이 보이는 행태와의 괴리만 커질 뿐이다.

‘밥그릇 쟁탈전’의 의혹을 피해갈 수 있는 인사를 한다면 그 난관을 넘어설 수도 있겠지만, 그런 법은 없다. 개혁 세력은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인물의 과거와 코드를 따지면서 모든 걸 자기들끼리 독식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들의 비루한 일상이 터져 나올 때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끔 호전적인 ‘의제 재설정’ 총력전을 벌이지만, 일시적 성공은 거둘망정 궁극적으론 ‘선한 권력’의 위선에 대한 환멸만 부추길 뿐이다.

정녕 ‘선한 권력’이 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겸손해야 한다. 그래야 소통이 가능해진다. 마키아벨리는 “겸손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고 했지만, 그건 500년 전 세상의 이야기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겸손을 먹고 산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정치학자 존 킨이 <민주주의의 삶과 죽음>에서 역설한 다음 주장을 가슴속 깊이 새겨야 한다.

“민주주의는 겸손 위에서 번영한다. 겸손은 얌전하고 순한 성격 혹은 굴종과 절대로 혼동해서는 안 되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덕이며 오만한 자존심의 해독제이다. 이는 자기 자신과 타인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능력이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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