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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교전규칙파’ 장군과 ‘헌법파’ 대령 / 김종대

등록 2020-09-03 17:46수정 2020-09-04 02:38

김종대 ㅣ 정의당 한반도평화본부장

2010년 11월23일 오후 2시34분에 연평도 포격사건이 일어났다. 자칫 전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급박한 위기의 순간에 당시 한민구 합참의장은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연평도 일원에서 우리 해병대의 응사로 교전 상황이 이어지는 시간에 합참 벙커에서는 북한을 F-15K 전투기로 응징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합참의장실에는 의장의 의사결정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시아이(CI)그룹’이라고 불리는 네명의 대령이 근무했는데, 이 중 한명이 한 의장 옆에서 “전투기로 응징할 수 있다”며 과감한 자위권 행사를 촉구했다. 이를 지켜보던 작전본부장 이홍기 중장이 의장에게 항의했다. “의장님, 부하는 접니다. 왜 자꾸 쟤들 이야기를 들으려 합니까?” 그러더니 그 대령을 향해 “너는 모르면 가만있어”라고 소리쳤다.

지상에서 벌어지는 국지분쟁에 전략무기라고 할 수 있는 전투기를 동원하면 전쟁으로 확산될 수 있다. 더군다나 한국군 위기관리의 규범은 유엔사가 정한 ‘정전 시 교전규칙’이었는데, 이에 따르면 전투기를 동원한 작전은 미7공군사령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교전규칙대로 교육받고 살아온 장군들에게 전투기 투입은 합참 권한을 넘어선 문제였다. 혼란에 빠진 의장은 월터 샤프 연합사령관에게 전화를 했지만 “전투기를 투입하든지 말든지 한국 쪽이 결정하라”며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답변만 돌아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합참의장은 직권으로 공대지 미사일을 탑재한 전투기 출격을 지시했는데, 이게 또 준비 과정이 지체되어 밤 9시가 넘어서야 연평도 인근에 도착했다. 30분 정도 비행을 하던 전투기 조종사가 연료가 바닥날 때가 되니까 합참의장에게 교전명령을 요청했다. 의장은 “그냥 돌아오라”고 했다.

이튿날이 되자 북한을 제대로 응징하지 못했다며 언론과 국회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당연히 합참은 확전 방지를 위해 정전 시 교전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했지만, 전투기 투입을 건의했던 그 대령은 격분했다. 국가가 공격을 받으면 당연히 자위권을 행사해야 하는 것이 헌법상의 책무이고, 유엔헌장에서도 모든 나라의 자위권은 고유의 국가 주권으로 보장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 대령은 이러한 당연한 국가 주권이 유엔사령부의 규범으로 통제된다는 것을 수용하기가 곤란했던 모양이다. 한편 샤프의 행태가 괘씸했던 한 의장은 전투기 출격 문제에 대한 서면질문서를 보냈는데, 일주일 뒤에야 “한국 정부의 자위권 사항”이라는 답변서가 도착했다. 합참의 내부 논쟁은 국방부로 불똥이 튀었다. 샤프의 답변서가 도착한 날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향후 자위권과 교전규칙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국제법 학자에게 연구용역을 발주하기로 했다”며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관변 학자들이 이때부터 전부 이 문제에 매달리던 중 새로 국방장관으로 내정된 김관진이 “전투기로 응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천명하자 논란은 가까스로 봉합되었다.

필자는 당시 꼭 전투기를 투입했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 헌법 위에 유엔사라는 존재가 군림하는 이런 비정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이 바로 한국 안보의 기본이라고 믿는 장군들의 의존심리가 놀라울 따름이다.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혼란을 줄인다며 한·미 군사당국은 엄청나게 많은 매뉴얼과 우발계획을 작성했지만 실상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정작 한국 안보는 우리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가, 우리는 평화와 안보의 당사자로서 헌법의 가치를 수호할 수 있는 나라인지,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에서 시작된다.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 정부가 온전하게 행사하는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조금만 입장이 곤란해도 답변을 회피하는 태평양사령부 예하의 한 지역사령관에게 전화를 해서 “쏠까요, 말까요” 묻는 이 나라 군대의 장성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최근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며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늦추려는 움직임을 드러내고 있다. 최근 상황을 보면 이 정부는 전작권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안 가져오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임기를 마칠 가능성이 크다. 30년 넘게 우리는 전작권 전환을 준비해왔다. 그런데도 그렇게 자신이 없는가? 이 문제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면서 어떻게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겠다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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