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민 ㅣ 자유기고가
나는 저때 뭘 했지? 1994년 중학생 은희의 일상을 세밀화로 그린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를 보다 생각했다. 영화에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나왔을 때다. 1994년 10월21일 오전 7시40분, 성수대교 북단 다섯째, 여섯째 교각을 잇는 상판이 내려앉았다. 다리를 건너던 차들이 한강으로 떨어졌다. 버스도 있었다. 그날 32명이 숨졌고 그중 9명은 무학여중고 학생들이었다. 영화 속 은희 언니는 무학여고에 다니는데 지각하면서 사고를 면했다. 은희는 강가에서 무너진 성수대교를 바라보며 울먹였다.
나는 은희가 살던 그 아파트에서 살았다. 동네에서 무학여중고에 다니는 아이들을 꽤 봤다. 그 학교 교복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런데 그 참사가 일어난 날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뉴스로 흘끗 보고 말았던 거다. 나랑 상관없는 일이었다. 수능이 코앞이었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그날, 나는 아마도 매일 그렇듯 밥 먹고 교과서를 외거나 문제집을 풀며 새벽 2시까지 하는 동굴 같은 독서실에서 졸다 깨다 했을 거다. 절박했다. 내가 안전할 수 있는 ‘신분’을 따내려면 이 시험에서 반드시 이겨야 했다. ‘실패하면 한국에서 인간 대접 못 받는다’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다. 그걸 공부라 말할 수 없겠다. 칸트가 지은 책 이름 따위를 달달 외웠는데, 그래서 칸트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 아는 줄 착각했다. ‘신분’을 따기 위한 순수한 도구였으니 그 의미 따윈 상관없었다. 동네에서 마주쳤을지 모르는 내 또래 아이들이 죽었는데, 나는 슬플 겨를이 없었고 슬프지도 않았다. 돌아보면, 내 안에 사람으로서 중요한 부분이 그렇게 죽어버렸던 거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느끼는 세계는 위험한 곳이다. 내 안전과 존엄은 성수대교처럼 갑작스럽게 무너져버릴 수 있다. 불안하다. ‘신분’이 유일한 안전망 같다. 집에서 학교에서 내가 배운 세계는 위계로 짜인 곳이었다. 위로 올라가거나 내려가거나 두 가지 선택밖에 없는 곳, 떨어지면 바로 강바닥인 곳. 요즘 나는 내가 느끼는 불행의 바탕엔 이런 인식이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기준이건 나보다 ‘윗줄’에 있는 사람 같으면 기죽거나 동경하고, 나보다 ‘아랫줄’이라면 무시하거나 동정하니 공감과 소통이 들어설 자리는 왜소하다. 그러니 당연히 외롭다. 외로우니 안전에 대한 불안이 커지고 신분을 향한 열망도 자란다.
고든 올포트의 책 <편견>을 읽다, 계속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보다간 그 결과가 외로움만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타 집단에 대한 편견이 큰 사람일수록 세상을 두려운 곳으로 인식한다. 억압과 처벌이 지배하는 권위적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신뢰가 아니라 힘이 인간관계의 핵심이라고 배우고, 이는 편견을 키우는 토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자기 안에 ‘나쁜 속성’은 처벌을 불러올 수 있으니 억압되는데, 이 ‘나쁜 속성’은 고스란히 타자라는 거울에 투사된다. 자신의 가치는 지위로만 느낄 수 있는데 지위는 언제든 떨어질 수 있으니 이 위계적 세계는 좌절과 불안의 지뢰밭이다. 좌절은 ‘쉬운’ 타자를 향한 공격으로 종종 바뀐다. 속으로는 두려움에 떠는 사람이 그나마 자신의 가치를 느끼려면 내려다볼 타인이 필요하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다. 순전히 내 행복을 위해서 기도한다. 세상이 사다리가 아니라 거미줄인 걸 느끼게 해달라고. 사람의 본성은 서로 사랑하고 공감하는 것이라고 절감하게 해달라고. 기도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기도가 이뤄질 때까지 나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