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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죽고 나니 보이네, 마피아 게임 / 이명석

등록 2020-09-25 14:52수정 2020-09-26 02:33

이명석 ㅣ 문화비평가

시작하자마자 죽는 게임을 좋아할 수 있을까? 나에겐 ‘마피아’가 그렇다. 나는 실내 게임을 좋아하고 또 잘한다. 루미큐브류의 두뇌 퍼즐 게임, 할리갈리처럼 빠른 손이 필요한 게임, 아이엠그라운드 같은 현란한 몸동작의 엠티(MT) 게임까지. 그런데 마피아만 시작하면 거의 곧바로 죽는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들이 나를 일단 제거한다. 저놈은 말이 많아, 남들 이간질시켜, 요리조리 빠져나가, 뭣보다 딴 게임에서 안 죽어 얄미워.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나는 다른 전략을 택한다. 그렇다면 내가 진행을 맡지. 그러곤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며 서로를 죽이는 친구들을 관찰한다.

마피아 게임은 1987년 모스크바대학교에서 심리학을 배우던 드미트리 다비도프가 고등학생을 위한 참여 과제로 처음 만들었다. 게임은 곧바로 소련 전역의 기숙사, 헝가리 멘사 클럽 등 동유럽 대학가, 영국과 미국의 여름 캠프를 접수했다. 배낭여행자들을 통해 동남아시아를 감염시켰고, 이어 세계 곳곳의 세미나, 워크숍을 점령했다. 나는 1990년대 초반 대학교 엠티에서 처음 만났는데, 냉전시대였다는 걸 고려하면 놀라운 전파 속도였다. 혹시 88올림픽에 온 소련 선수들이 알려주었을까? 이후 마피아는 늑대인간, 암살범 등의 변종 게임을 만들며 새로운 장치를 추가했다. 최근 마피아 게임을 즐기는 걸 보면 원래의 구성에 의사, 경찰 등 개량된 게임의 요소를 덧붙인 것 같다.

마피아는 대화로만 진행하는 아주 단순한 게임이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뭘까? 나는 두 가지의 강력한 매력을 들고 싶다. 첫째, 우리는 마피아라는 은유 속에서 수많은 닮은꼴을 떠올린다. 상상의 존재로 보자면 늑대인간, 뱀파이어, 증상 발현 이전의 좀비들이 비슷한 부류다. 겉보기엔 우리와 구별할 수 없지만, 때가 되면 기어 나와 우리를 해친다. 현실적 존재로는 적국에서 보낸 간첩, 노조에 잠입한 프락치, 기업에 침투한 산업스파이일 수 있다. 최근의 시사와 연결해보자면 광화문 집회 참가를 숨긴 코로나 무증상 보균자, 내부 정보를 이용해 주가를 조작하는 작전세력, 자기가 투자한 부동산을 사라고 추천하는 유튜버가 마피아다. 다비도프는 이 게임을 ‘정보가 없는 다수와 정보를 가진 소수의 대결’이라 요약했다.

둘째, 이 게임은 우리의 어두운 욕망을 드러내 해소시킨다. 물어보자. 당신은 시민과 마피아 중 어느 쪽일 때 더 재미있나? 나는 마피아다. 친구들 대부분도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중고나라 사기꾼, 사이비 종교 포교자, 보이스피싱 범죄자들에 둘러싸여 항상 그들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마피아가 되면,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알고 거짓말로 상대를 농락할 수 있다. 마피아 게임은 이론적으로는 거짓말쟁이에게 유리하다. 그런데 바깥에서 구경하면 의외의 면모를 발견한다. 평소에는 거짓말을 전혀 못 할 것 같은 친구들이 마피아를 맡으면 능청스럽게 잘도 한다. 자신의 선량한 이미지를 백분 활용하는 것이다.

마피아 게임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가르친다. 그런데 ‘거짓말하라’고 가르치는 건 아니다. ‘거짓말이 작동하는 방식’을 알려준다. 누구든 거짓말쟁이의 역할을 체험하고 나면, 거짓말쟁이가 어떤 식으로 정보를 조작하는지 더 잘 알게 된다. 세상에 떠도는 가짜뉴스를 판별하는 아주 좋은 방법은 수업 시간에 가짜뉴스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또한 마피아 게임은 경고한다. 다수의 힘으로 누군가를 제거하는 게 항상 올바른 행위가 아니라는 걸. 외국인, 성소수자 등 약자를 ‘일단 지워버리자’고 외친 목소리가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결정적 거짓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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