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숨&결] 낙태죄 살린 정부 입법안 / 배복주

등록 2020-10-07 15:57수정 2020-10-08 15:06

배복주ㅣ정의당 여성본부장

나는 18년 동안 성폭력 피해자를 상담하고 조력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했었다. 피해자의 90%는 장애가 있는 여성이었고, 그중 대부분은 지적장애 여성이었다. 상담하고 지원했던 수많은 피해자들은 아직도 나의 기억에 남아 있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안부가 궁금한 피해자도 꽤 있다.

몇년 전, 상담소로 찾아온 경도의 지적장애가 있는 여성이 기억난다. 그녀는 임신 23주가 넘어가고 있는 상태였고, 스스로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배가 불러오는 것은 체중이 늘어난 것이라 여겼고, 생리를 하지 않은 것에도 평소 생리가 불규칙적이라 임신까진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성폭력 피해 때문에 임신한 것이라고 했고, 상담소에서 임신중지(낙태)를 지원해줄 수 있는지를 문의했다.

이런 상담은 꽤나 어렵고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임신하게 된 과정, 임신 인지가 늦은 사유, 임신중지에 따른 법적·행정적·의료적 지원 범위 등을 확인하는 일을 동시적으로 신속하게 진행해야 하기에 쉽지 않은 상담이고 지원이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누군지, 아니 정확하게는 생물학적 부가 누군지를 알지 못했다.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남성과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성교를 했기 때문에 누가 가해자 혹은 생물학적 부인지 알 수 없었다. 채팅으로 만난 남성과의 성관계에 강제성은 없었지만, 콘돔 사용 요구에 대한 상대방의 거부는 분명히 있었다고 한다. 원치 않은 임신이었고 이를 늦게 인지한 것이다. 이 사안은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었고 법적인 성폭력 범죄행위로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현행 모자보건법 14조의 ‘강간·준강간으로 인한 임신중지 허용 사유’를 적용할 수 없고 그로 인해 여성가족부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지원하는 의료비 수급은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와 피해자 어머니의 절박한 요청은 ‘수술이 가능한 병원’이라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기임신 상태로 접어든 피해자를 수술해줄 병원을 찾지 못했고 피해자는 출산했다.

경도 지적장애 여성이 겪었던 일을 지켜보면서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지적장애 여성은 인지의 제한성으로 인해 스스로 자기결정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임신을 하게 되면 임신중지 여부나 출산 여부가 가족이나 주변인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그녀가 자신의 권리 행사를 하기 위한 선택과 결정을 하는 데 무엇이 필요했을까. 그녀가 성적 주체로서 성적 실천을 하는 데 필요한 교육을 그녀의 ‘장애에 맞게’ 받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랬다면 성관계 당시에 상대방의 콘돔 사용에 대한 협상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제도교육에서 혹은 공동체 안에서 평등하고 안전한 성적 관계를 일상적으로 소통하고 배울 수 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이처럼 성적인 관계에서 착취적이고 불평등한 관계를 지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몸의 변화에 대한 정보를 일상적으로 적절하게 제공받고, 필요하다면 상담을 받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랬다면 성관계 이전에 피임하거나 임신 초기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고 도움이 되는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후기임신 상황이라 의료적 서비스를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임신중지에 대한 당사자의 간절한 요구가 있었지만, 23주차 임부에게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의학적 정보나 의료적 가능성을 설명해주는 의사를 만나지 못했다. 경도의 지적장애가 있는 여성이 원치 않은 임신을 늦게 인지한 경우에도 적절한 상담을 받거나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거나 의료적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야 했다.

이제 3개월 남았다. 국회와 정부는 성적 권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포괄적 성교육, 임신한 여성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정보 및 상담 제공, 보건의료정책 개선, 국가 책임의 양육환경 조성 등 성과 재생산 권리 보장을 위한 법과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7일 발표된 정부의 입법예고안은 사실상 낙태죄를 유지하고 있다. 매우 실망스럽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1.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2.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우리가 모르는 한덕수 [12월26일 뉴스뷰리핑] 3.

우리가 모르는 한덕수 [12월26일 뉴스뷰리핑]

한덕수가 꿰맞춘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 3가지 논리 [12월27일 뉴스뷰리핑] 4.

한덕수가 꿰맞춘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 3가지 논리 [12월27일 뉴스뷰리핑]

내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설] 5.

내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