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혜 l 시인
무언가가 성미를 거슬러 언짢아진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는 ‘화나다’이다. 나는 유년기 말을 익히며 성난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로 ‘화나다’를 가장 먼저 배웠다. 그러다 학교에서인지 방송에서인지 누군가 ‘열받다’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았다. 어린 나에게 그 말은 퍽 인상적이었다. 화났다는 표현은 점잖고 나긋한 면이 있는데 열 받았다는 말은 공감각적으로 강렬했다. 뜨겁게 폭발하는 격정이 잘 표현되어 금세 입에 붙었다.
좀 더 자라서는 동년배들이 ‘빡돈다’는 말을 쓰는 것을 주워들었다. 사춘기의 친구들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빡돌곤 했다. 이 이상의 표현이 있을까 싶던 차 성인이 되어 ‘빡치다’라는 말을 접했다. 가히 분노의 최상급 같은 이 단어는 발음부터 강력해서 격노를 표현하기에 그만이었다. ‘아무개 화났어’라고 한다면 팔짱을 끼고 입을 꾹 다문 사람이 떠오르지만 ‘아무개 빡쳤어’라고 한다면 길길이 날뛰는 형형한 분노가 그려진다.
우아한 언어 습관은 아니지만 ‘빡치다’ 앞에 ‘개’를 붙이는 경우도 왕왕 있다. 뭔가를 강조할 때 쓰는 접두어도 시대를 타고 변화한다. 한때 가장 흥했던 말은 ‘짱’이었다. 나는 교복을 입던 시절 ‘짱’이 없으면 말을 못 할 지경이었다. 떡볶이는 짱 맛있었고, 어제 컴백한 아이돌은 짱 멋있었다. 자라며 ‘개’도 만만치 않게 소환했다. 도대체 한국인에게 개는 어떤 짐승이길래 우리는 진상을 개진상이라 부르고 짜증도 그냥 내는 것이 아니라 개짜증을 내는 것일까. 개는 심지어 더 격해지기 위해 ‘캐’가 되기도 했다. 박살이 날 때는 캐박살쯤은 나줘야 뭔가 부서졌다 싶은가 보다. 그 외에도 ‘초’나 ‘핵’ 정도의 접두어가 약진했지만 대세가 되진 못했다. 최근에는 ‘쌉’이 귀에 걸리기 시작했다. 뭔가가 너끈히 수행 가능할 때 오늘날 그것은 ‘쌉가능’의 경지에 이른다.
호감이나 우수함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표현도 흐름을 타고 있다. 이제는 사어가 된 듯하지만 태곳적엔 ‘캡’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캡은 앞서 언급한 짱에 밀려 어느 혓바닥에서 스러졌다. 뭔가에 마음이 흡족하면 한때 사람들은 무조건 “짱이다”라고 외쳤다. 그러다 ‘대박’이 대박 유행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새로 차를 뽑았을 때, 가족이 시험에 합격했을 때 이 말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대박이다!” 근래에는 ‘쩐다’는 표현을 많이 듣는다. 이번에 개봉한 블록버스터 영화도 쩔었고, 파란 잉크를 탄 듯한 어제의 하늘도 쩔었다.
언급한 대부분의 언어는 비어 혹은 속어이고 줄을 세워두고 보니 점차 강렬해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불닭 소스도 모자라 핵 불닭 소스가 나오는 것처럼 점점 자극적인 언어가 우리의 혀를 장악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 모두 이런 상스러운 언어를 버리고 점잖은 말을 사용하자’는 취지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무릇 언어란 유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말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표현을 개발한다. 멋진 공연을 두고 “무대를 찢었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고 나는 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은 비록 ‘쩔다’ 정도의 범용성까지는 획득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대중의 선택인 것이고 내년 즈음엔 ‘찢다’도 ‘쩔다’도 아닌 제3의 단어가 그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입말은 입에 붙어야 그 지위를 차지한다. 말이 시시하면 입에서 곧잘 미끄러진다. 현재 대중화된 모든 단어들은 각축 끝에 살아남은 강자들이다. 나는 그 언어들의 세력다툼이 언제나 흥미롭다. 때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통속어도 태어나지만 그 호오를 판단하는 과정도 재미있다. 매일 새로이 부상하는 말과 스러지는 말을 본다. 이 말의 잔치는 우리의 일평생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