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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뜬장의 네 기둥

등록 2020-10-14 16:10수정 2020-10-15 02:42

손아람 ㅣ 작가

뜬장은 말 그대로 공중에 뜬 장이다. 기둥 네개로 땅을 지지하고 한뼘쯤 떠 있는 철장 속에서, 개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웅크린 채 보낸다. 몸을 뒤척일 공간이 부족한데다 가느다란 철망을 디딘 발바닥이 아프기 때문이다. 철망 아래로는 똥이 쌓여 있다. 뜬장을 거친 수십마리의 개들이 싸놓은 똥이 지질 단층처럼 색을 달리하며 굳어 있는 경우도 있다. 개는 생활공간에 배변하지 않는 습성을 가졌기에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배변을 참는다. 운 좋게 뜬장을 나온 개들은 그 자리에서 똥을 대여섯번씩 몰아 싼다. 체내의 염분이 다 빠지고 투명한 물만 나올 때까지 오줌을 쥐어짜기도 한다. 이 개들은 제대로 걷지 못한다. 오래 갇혀 있던 개들은 뜬장을 나와서도 한동안 엎드려 누운 채로 대소변을 본다.

뜬장에 개를 키우는 사람은 똥을 치우지 않는다. 그 편리함이 뜬장을 쓰는 유일한 이유다. 뜬장의 가학적인 구조에 담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 동물은 어차피 죽는다.’ 경기 양평의 한 보신탕집 개들도 뜬장에 갇혀 있었다. 여기서는 뜬장에 개를 키울 뿐만 아니라 끌어낸 개를 그 앞에서 잡았던 듯했다. 늘어선 뜬장 앞에는 장작더미가 쌓여 있었고, 반으로 쪼개진 두개골이 굴러다녔다. 개털이 눈처럼 흩날린 스산한 숲속으로 솟아난 나무마다 피 묻은 밧줄이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교수형이 집행된 흔적이었다.

이 집은 보신탕 한그릇을 8천원에 판다. 한마리는 5만원이다. 동물구조 활동가들이 찾아가 개를 사서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이 가격은 대번에 15만원으로 치솟았다. 애지중지 길러왔으니 헐값에 넘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활동가들이 난처한 기색을 내비치자, 식당 주인은 협상력을 높일 요량으로 주방에서 칼을 꺼내왔다. 사각사각 칼 가는 소리에 애지중지 길러왔다는 개들이 겁에 질려 날뛰기 시작한 덕분에 그는 뜻대로 교섭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거래가 성사되자마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식당에서는 직접 만든 떡까지 활동가들에게 돌리면서 고마워했다. 무엇이 고맙다는 걸까? 요즘 세상에도 이런 순진한 호구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식당 주인은 개를 음식으로 요리해 파는 것보다 윤리 마진을 붙여 방생하는 게 더 수지가 좋다는 사악한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다. 반은 옳고 반은 틀린 말이다. 식당 주인도 호구다. 거기서 구출된 개들은 사설 위탁소로 가는데, 보육비로 한마리당 매달 30만원이 들어간다. 그의 단순한 셈법 바깥에는 다른 생각과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더 넓은 세상이 있다. 내가 그였다면 개의 목숨과 관련된 생계로 굳이 보신탕집을 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육견업자들은 식용견과 애완견이 구분된다고 주장하지만, 식용견이라는 품종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뜬장 속에는 진돗개, 시바견, 스피츠, 치와와처럼 전형적인 애완견종과 심지어 임신 중인 개까지 갇혀 있다. 개는 가축으로 취급되지 않고 그렇게 취급될 수도 없다. 개가 특별한 동물이라서도 아니고 축산법에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개를 가축으로 번식시키는 것보다 유기견 포획이 훨씬 더 경제적이라서다. 강아지는 자라는 동안 체중의 10배에 이르는 먹이를 먹고, 성견이 된 뒤로는 자신의 ‘시장 가격’에 육박하는 사료를 매달 먹어치운다. 개를 제외하면 육식동물을 먹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지적했듯이, 인류의 육식동물 식용화 시도는 경제성 부족으로 모조리 실패했다. 이 경제성 이론이 개에게만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유감스럽게도, 비용을 떠안으면서 사랑을 쏟아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일부가 어느 순간 개를 버리기 때문이다.

‘보신탕의 경제학’은 ‘애완견 시장’의 파생물이다. 개를 새로 출시된 장난감처럼 구매하고 싫증 난 장난감처럼 버리는 한, 뜬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개 식용이 근절되려면 유기견을 줄여야 한다. 개를 반려동물로 받아들이는 절차가 까다로워야 하고, 상품 거래가 금지되어야 한다. 반려견의 번식과 분양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앞서야 한다. 다섯 생명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반려인만이 다섯 강아지의 탄생을 지켜볼 자격을 갖는다. 뒷바라지의 한계를 느낀 반려인이 손에서 떠나보낸 순간, 강아지 혹은 그 자손이 처할 암울한 운명은 순전히 확률에 달려 있다. 뜬장의 네 기둥 가운데 적어도 세개는 그 확률 위에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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