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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애호가의 자격 / 정대건

등록 2020-10-16 15:16수정 2020-10-17 15:30

정대건ㅣ소설가·영화감독

얼마 전 고마운 기회로 ‘변화하는 시네필 문화와 극장의 미래’에 대한 대담에 참석했다. 시네필(cinéphile)은 영화 애호가를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cinéma’(영화)와 ‘phile’(‘사랑한다’는 의미의 접미사)을 바탕으로 한 조어이다. 대담을 준비하면서 주변에 영화깨나 좋아하고 많이 본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스스로 시네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영화를 많이 좋아하기는 하지만, 영화를 3천편 이상 봤다거나 전문적 지식이 많아야 한다거나 같은 특별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시네필이 무슨 선발 조건이 있는 특수 부대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시네필인가? 이 물음에 답변을 주저하며 ‘이전에는 시네필이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 또한 한때는 영화제에서 하루에 3~4편의 영화를 보던 시절이 있었으나, 부끄럽게도 어느새 그런 체력과 열정을 잃어버렸다. 이 부끄러움은 무엇에 대한 부끄러움인가. 나는 여전히 영화를 좋아하고, 사람들 앞에 손을 들고 서서 ‘일주일에 한번은 극장에 가겠습니다!’ 하고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한 적도 없는데.

많은 이들이 무언가의 팬임을 밝힐 때 ‘정말 좋아하는 분들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만…’ 하고 겸양의 말을 덧붙이는 경우들을 본다. 이렇게 눈치를 보는 것은 취향의 영역에서 타인을 깎아내리며 자신의 우월함을 뽐내는 풍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마니아적 취미는 ‘부심’과 결부되고는 한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각자 자신의 취미와 취향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것은 문화를 향유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언가의 애호가가 됨에 있어서 특정한 자격이 필요한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느 가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도 단 한곡으로도, 어느 작가의 전집을 읽지 않아도 단 한권으로도, 자기가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면 그 사람의 열렬한 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평양냉면 부심’을 부리는 사람이 많았다. 진정한 평양냉면의 맛을 모르는 거라고, 겨자를 넣으면 안 된다고, 쇠젓가락을 쓰면 안 된다고 ‘면스플레인’을 하던 사람들은 옥류관 평양냉면이 미디어에 공개된 이후 웃음거리가 되었다. 평양냉면도 커피도 맛 좋은 곳을 안다면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주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실천하면 될 일이지, 타인의 취향에 대해 ‘진정한 맛을 모르네’라면서 깎아내릴 이유는 없다. 누가 최고의 뮤지션인지, 애플인지 삼성인지, 자신이 이룬 성취도 아닌 것에 부심을 가지며 등급을 나누는 것은 얼마나 낭비인가. 이러한 호사가들의 남을 깎아내리는 문화가 좀 더 자신의 취향을 애정 어리게 이야기하는 문화가 되었으면 한다.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있다. 이들은 자랑하거나 누군가의 우위에 서기 위해 덕질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 어떠한 보상 때문이 아니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진심 모드’이기 때문에 빛이 난다. 누군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눈을 빛내며 말할 때의 표정은 언제 보아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자신의 취향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타인의 취향이나 취미를 깎아내리는 표정은 어떤 각도에서 봐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 냉소와 조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값싼 것이고 무언가를 묵묵히 사랑하는 마음이 더 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정은 경쟁의 도구가 아니고 취향에는 정답이 없다. 많은 사람이 더 자신 있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를 말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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