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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사람 취급 못 받아야 사람이 되나 / 김소민

등록 2020-10-23 15:54수정 2020-10-24 02:33

김소민 ㅣ 자유기고가

왜 사람 취급 못 받는 상황을 인내하는 게 사람이 되는 길인가?

한국 ‘부랑인’ 수용소들의 입소 풍경은 비슷했다. 1968년 경기도 안산 ‘선감학원’에 수용된 당시 12살 김성환씨는 첫날 ‘바리캉’으로 머리를 박박 깎였다. 개인 소지품은 뺏기고 검정 고무신과 광목으로 만든 원복을 받았다. 그는 시멘트 바닥을 긁던 곡괭이 소리를 아직 기억한다. 그 곡괭이로 맞았다. 1961년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갯벌에 끌려와 ‘서산개척단원’이 된 정영철씨는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인간 재생창’이라는 몽둥이로 맞았다. 1984년 8살에 ‘형제복지원’에 끌려온 한종선씨도 머리를 깎이고 파란색 추리닝과 검정 고무신을 받았다. ‘8410-3618’, 그는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렸다. 설탕을 녹인 ‘달고나’를 좋아했던 소년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 전형적인 입소 방식은 사람의 개별성을 삭제하고 몸의 자율성을 박탈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너는 네가 아니고,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머릿속에 새겨 넣는다. 그러면 사람은 다루기 쉬운 물건이 된다. 이 세 수용소는 모두 군대식으로 운영됐다. 목욕할 수 없는데 청결검사를 하는 식으로 지킬 수 없는 규칙을 세우고 어겼다고 때렸다. ‘대가리’ 박는 얼차려는 일상다반사다. 이 모든 폭력은 ‘갱생’의 명분 뒤에 가려졌다. 사회 부적응자들을 ‘산업역군’으로 만든다는 부랑인 정책은 정권의 치적으로 홍보됐다. ‘홍보거리’로 쓸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사회정화 사업’이 대중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운 좋게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국민’이라 이런 극단적 폭력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개별성을 지우는 학대가 정신력을 키운다는 이상한 믿음은 내가 받은 교육에도 온건한 버전이었을망정 스며 있었다. 이름도 ‘극기훈련’이었다. 1980~9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한 학기에 한 번 정도 갔다. 모두 똑같은 파란색 운동복을 입었다. 팔 벌려 뛰기를 시키며 마지막 구호는 붙이지 말란다. 전교생 중 한 명만 마지막 구호를 붙여도 얼차려 횟수가 두 배로 뛰었다. 학생들 누구도 이 이해할 수 없는 규칙에 동의한 적 없다. 규칙은 교관이 정하고 우리는 따라야 한다. 다리가 후들거릴 때쯤 되면 둘 중 하나를 배운다. 자꾸 구호를 붙이는 ‘덜떨어진 친구’에 대한 원망이거나 내 ‘덜떨어짐’ 때문에 동료에게 짐이 된다는 죄책감이다. 그런 교육은 내 세대에서 끝난 줄 알았다. 20대 청년 두 명에게 그들이 궁금해하지도 않는 ‘나 때는 말이야’ 회고를 하는데 그런다. “저희도 했어요. 수련회 가서. 줄을 맞춰 서는데 몇명이 잘 못 맞췄나 봐요. 전체가 엎드려뻗쳐를 했어요. 그때 ‘왜 줄을 맞춰 서야 하지?’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학대로 사람 만든다’는 생각은 2020년에도 강력하다. 그 생각이 얼마나 강력하냐면, 스스로 학대 속으로 들어가게 할 정도다. 얼차려를 견디는 장면에 시청자들이 ‘감동’할 정도다. 시즌1 누적조회수가 6천만이었다는 유튜브 프로그램 <가짜 사나이>를 보면 그렇다. 군복을 입고,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참가자들은 “나약함을 이기고” “게으름을 극복하려고” 눈이 뒤집힐 정도(한 참가자는 정말 눈에 흰자위만 남았다)의 얼차려를 받는다. 중간에 그만둔 참가자들은 패배감에 눈물을 흘렸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려는 ‘더 나은 인간’은 어떤 사람일까? ‘게으름을 극복해’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사람? ‘나약함을 이기고’ 어떤 모욕이라도 참아내는 사람? 어쩌면 이 땅에선 그렇게 개조된 사람이 ‘더 나은 인간’이라 폭력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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