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선거에서 최종 결선을 치르고 있는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과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전 나이지리아 재무장관이 지난 7월15~1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각각 출마 기자회견을 할 당시의 모습. 연합뉴스
세계무역기구(WTO) 차기 사무총장 선출 절차가 거의 끝나가면서 최종 결선 승자 발표가 임박했다. 164개 회원국들과의 최종 협의 절차는 세계무역기구 일반이사회(스위스 제네바)에서 오는 27일 종료된다. 유명희(53) 통상교섭본부장과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66) 전 나이지리아 재무장관(전 세계은행 부총재) 중에 누가 총장으로 뽑혔는지 빠르면 28일 발표될 수도 있다. 늦어도
11월7일까지는 확정된다.
어느 한쪽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면 곧바로 차기 총장으로 추대된다. 이 현저한 격차를 근거로 다른 후보를 지지한 국가들까지 다시 설득해 컨센서스(만장일치)로 뽑는다. 지지 선호도가 엇비슷해 박빙으로 나타나면 좀 더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즉 유럽연합·미국·중국 등 통상 강국들끼리 만나 물밑에서 추가 협의를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예비 선출자를 내놓았더라도, 무역 강대국 중에 한둘이 ‘그 후보는 마음에 안 든다’며 끝까지 반대하면 이제 표결로 가게 된다. 하지만 세계무역기구(1995년 출범)에서 표결까지 간 사례는 전신인 가트(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1947년 창설) 체제까지 포함해 70여년 동안 단 한번도 없었다. 강대국이라도 이런 전통을 굳이 깨면서 반대하기란 어렵다.
최신 동향을 보면, 정부 안팎에서는 미국 대선(11월3일) 이전에 발표될 공산이 크다고 관측한다. 고위 경제당국자는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더라도 (대선과 상관없이) 지금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미국은 대외적으로 여태까지 ‘중립’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미국은, 전임 사무총장이 임기를 1년 남겨놓고 도중에 사임하는 사태에 이를 정도로 이 기구가 무기력하게 표류하고 있는 사정에 스스로 상당한 책임이 있는 국가라서 이번 결정에 별다른 권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총장 향배를 쥐고 있는 쪽은 이 기구를 태동기 때부터 이끌고 있는 유럽연합(EU·27개국)이다. 유럽연합은 공동으로 선호 후보를 제시할 예정인데, ”이번은 아프리카 순서”라는 분위기가 꽤 있는가 하면 일부는 ‘유명희’를 내세우고 있어 다소 어수선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번 선거전은 인물보다는 지역적·역사적으로 가까운 후보에 표를 몰아주는 ‘지역·연고주의 결집’ 행태가 뚜렷하다. 164개 회원국은 아프리카 44개국, 유럽 37개국, 아시아·태평양 49개국, 중남미 31개국, 북미 3개국 등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주에만 인도·덴마크·룩셈부르크·이탈리아·이집트·오스트레일리아·브라질·말레이시아 등 10여개국 정상과 전화통화를 해 ‘유명희 지원’ 총력전을 펼쳤다. 중국·일본·아프리카 쪽은 나이지리아 지지를 이미 표명한 터라, 우리에게 우호적인 남미·유럽·아시아 국가들을 겨냥해 설득·교섭하는 전략이다. 고위 통상당국자는 “이제는 무역·통상 사안을 넘어 한국과 나이지리아 사이의 국가 자존심 대결도 걸려 있는 외교 이슈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3개월 전에 유 본부장이 입후보할 당시엔 정부 안에서 회의적인 분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한 경제당국자는 “처음에 외교 쪽에서 당선 확률이 낮다며 발을 빼기도 했다”고 말했고, 선거전 초반에 또 다른 고위 당국자도 “외교부가 적극 나서 줘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선거 중반부터 직접 지휘하고 유 본부장이 최종 결선에 오르자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현직 통상장관으로서 유 본부장은 우리가 여러 중견국들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두텁게 구축한 상호 신뢰·지지 기반을 갖고 있다. 상대 후보는 제3세계 및 개발도상국의 경제발전을 돕는 세계은행에 25년간 근무(부총재 역임)한 정치적 이력을 바탕으로 여러 개도국 각료들과 친분·인맥을 쌓아온 것으로 알려진다. 세계무역기구는 유엔 같은 다른 국제기구에 견줘 사무총장(임기 4년) 개인의 권한이 덜하고, 제네바 주재 164개 개별 회원국 대사들이 서로 협력·갈등하면서 함께 움직이며 끌고 가는 조직이다. 총장 역할 수행에 필요한 덕목으로 통상분야 전문성뿐 아니라 지역·국가 간 무역 분쟁을 조정할 정치·외교 역량 발휘도 고려한다는 얘기다. 청와대·정부는 “만만치 않은 상황을 헤치고 선전해온 유 본부장의 분투” 결과를 겸손하게 기다리고 있다.
세계무역기구는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이 사실상 좌초한 채 ‘무용론’마저 대두하고, 통상 대국들이 자유무역 규범을 대놓고 무시하는 일도 빈번하다. 배가 표류해 침몰하고 있는데 선장은 도망가버린 형국이다. 다자·자유무역체제의 대표 수혜국으로서 우리는 이 기구의 빠른 정상화·복원을 위해서도 ‘한국인 총장 탄생’ 소식을 고대하고 있다.
조계완 산업부 기자
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