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최종 라운드까지 진출한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선거를 둘러싼 진통이 ‘미-중 간의 대리전’의 결과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중국이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아프리카 출신 ‘세계무역기구 사령탑’을 미국이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던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선거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각) 갑작스럽게 ‘짙은 안개 속’으로 빠져들었다. 데이비드 워커 세계무역기구 일반이사회 의장은 이날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전 나이지리아 재무장관이 “회원국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며 그를 “2024년 8월까지 임기가 보장된 차기 사무총장으로 추천한다”고 밝혔다. 1995년 창설된 세계무역기구의 사무총장 선출 관례를 살펴볼 때 이 시점에서 승부는 사실상 결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결정에 반대하는 딱 한개 국가가 있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었다. 키스 로크웰 세계무역기구 대변인은 “27개국 대표들이 이날 회의에 참가했다. 그 중 한나라 대표만 응고지를 지지하지 않고, 한국의 유 본부장을 계속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그것은 미국이었다”며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이 세계무역기구 회원국들의 콘센서스에 사실상 ‘몽니’를 부리고 있다는 고발이었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 역시 지난달 29일 “미국이 반대 의사를 밝히지마자 유럽의 동맹들, 중국, 캐나다,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20개 넘는 국가 대표들이 반발했다. 한 유럽 국가의 대표는 미국이 반대를 하려면 좀 더 일찍 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고 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미국은 굴하지 않았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한발 더 나아가 세계무역기구가 대대적인 개혁(major reform)을 하려면 적임자인 유명희 본부장이 직책을 맡아야 한다는 ‘이례적 성명’까지 내놨다.
키스 로크웰 세계무역기구 대변인은 28일 스위스 제네바 세계무역기구 본부에서 응고지 후보에 반대한 국가는 미국 한 나라밖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제네바/로이터 연합뉴스
미국은 왜 이렇게 무리를 하는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응고지 전 재무장관이 무역 분야에 큰 경험이 없다는 점을 꼽고 있다. 실제, 미국의 한 고위 관료는 <월스트리트 저널>과 인터뷰에서 “응고지 전 재무장관은 대부분의 경력을 세계은행에서 보내 무역 분야에 경험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보다는 25년 동안 무역과 통상 분야에서만 잔뼈가 굵은 유 본부장이 더 적임자란 주장이다.
하지만, 미국의 속내는 더 복잡한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그동안 세계무역기구가 미국에게 ‘불공정’하다고 불만을 터뜨리며 여러 차례 ‘실력 행사’를 해왔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12월 복심제인 세계무역기구의 최종심을 담당하는 상소기구(Appellate Body) 위원 임명을 반대한 것이다. 미국이 상소기구 위원의 임기가 만료될 때마다 새 위원의 임명을 반대해 왔다. 그로 인해 7명 정원인 상소기구는 지난해 12월11일 위원회 가동을 위해 필요한 최소 인원인 3명을 채우지 못해 기능이 정지된 상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미국은 시장을 왜곡하는 중국의 국가 자본주의 시스템과 맞서려면 세계무역기구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쳐야(major overhaul) 한다고 보고 있다”는 미 고위 관료의 말로 현재 이 기구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했다. 세계무역기구의 대대적인 개혁을 위해선 중국의 영향력에 취약한 응고지 전 재무장관보다는 미국의 동맹국이자 통상 전문가인 한국의 유명희 본부장이 더 낫다고 판단을 내린 셈이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도 30일치에서 “미국이 응고지에 반대하는 것은 중국이 찬성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에서 개발도상국 대우를 받으며 무역에서 여러 혜택을 받아왔다고 비판해 왔다. 아프리카 출신의 사무총장이 취임하면 개발도상국에 유리한 무역정책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경계심이 크다”고 말했다.
문제는 앞으로 일정이다. 세계무역기구는 9일 열리는 일반 이사회에서 차기 사무총장을 최종 확정할 계획이다. 하지만, 164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사무총장을 뽑아온 관례를 생각할 때 미국의 반대가 이어지는 한 이날 최종 결정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세계무역기구는 그럴 경우 규정에 근거해 투표를 통해 사무총장을 뽑겠다는 뜻을 언뜻 비췄지만, 실제 투표를 결단할 수 있을지는 분명치 않다. 일부 외신들은 응고지 전 재무장관과 유명희 본부장의 대립이 이어질 경우 1999년 사무총장 선거 때와 같이 두 후보가 3년씩 임기를 나눠서 하는 타협안이 도출될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결과는 3일 치러지는 미 대선의 영향을 크게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펜실베이니아 뉴타운 유세장면. 뉴타윤/EPA 연합뉴스
현재 남은 변수는 두 가지다. 첫번째는 3일로 다가온 미국 대선 결과다. 그동안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세계무역기구와 대립해 온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패배하고 ‘동맹과 조화’를 강조해 온 조 바이든 후보가 당선될 경우 미국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두번째 변수는 한국의 동향이다. 세계무역기구의 결정이 전해진 직후인 지난달 29일 실무부서인 산업통상자원부와 외교부는 유명희 본부장의 ‘명예로운 퇴각’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청와대에서 ‘추이를 좀 더 지켜보자’는 쪽으로 결정을 미룬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입장에선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 유명희 본부장의 당선을 위해 총력 외교를 펼쳐 온 상황이라 섣불리 패배를 인정하기 쉽지 않다. 외교부 당국자는 30일 기자들과 만나 향후 절차와 관련해 “어떻게 할지 내부 검토 중이다. 종합적으로 상황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한국 정부는 주변국의 따가운 눈총을 견디며 미 대선 결과와 그 이후 미국의 대응을 지켜볼 것으로 보인다. 선거를 1999년과 같은 ‘무승부’로 몰고 갈 가능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인식한 듯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번 선거에서도 (1999년과 같이 대립하는 두 후보가) 3년씩 임기를 하는 흐름으로 이어진다면 열세였던 한국으로선 충분히 성과를 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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