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석 ㅣ 문화비평가
불교 덕질에 빠진 친구의 꼬임으로 용문사에 템플스테이를 갔다. 나는 신심 한톨 없는 독실한 무신론자다. 그러니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 유명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걸 볼 기회구나.’ 마스크를 입에 채우고 헐떡대며 산을 올랐더니 거대한 은행나무가 나타났다. 그런데 상상과는 달랐다. 조금씩 물들고는 있었지만, 달력에 나오는 황금빛 광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떠올렸다. 이 나무의 생명력이 워낙 좋아 남들보다 늦게 그리고 한꺼번에 물든다는 이야기를. 그러곤 또 서리가 내리면 우수수 떨어진다지. 그러니 내일이면 또 달라질지 모른다.
다음날 아침 다시 은행나무를 찾아갔다. 어제와는 분명 달랐다. 그러나 아무리 카메라의 각도를 돌려봐도 ‘내가 천년 묵은 황금의 나무를 직관하였노라’ 인증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쭈그러진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근처에 있는 나무에 누군가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아직 잎이 무성한 가지들을 툭툭 자르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보는 사람은 아슬아슬했지만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 나무는 왜 자르시는 겁니까?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나는 고사(故事)에라도 나올 법한 물음을 떠올렸다. 그러나 답을 해줄 스님은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속절없이 뚝뚝 떨어지는 가지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그 나무가 묘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해우소 바로 옆 비탈에서 휘어져 자라고 있었는데, 그 뿌리는 해우소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저기에 무슨 비밀이 있을까?
스님 대신 스마트폰에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몇년 전만 해도 그곳 해우소가 재래식이었는데, 그 분뇨가 거름이 되어 거대한 은행나무의 양분이 되어주었단다. 덕분에 1100살 먹은 할머니가 지금도 왕성하게 열매를 맺고 있다고. 그래! 어쩌면 저 나무는 해우소 바로 앞에 앉아 은행나무에게 갈 진짓상을 날름날름 훔쳐 먹어왔는지도 몰라. 그래서 그 얄미운 짓을 막으려고 가지를 잘라내는 거지. 하지만 애초에 나무 밑동을 뽑아버리지 않은 이유는 또 무엇일까?
개운하지 않은 답을 안고 숙소로 가 짐을 싸서 나왔다. 마당에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어린 고양이가 나타나 작은 나비를 쫓았다. 나의 어린 머리도 멍한 상태로 이런저런 생각을 좇았다. 절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그러다 나뭇가지를 자르던 사람을 떠올렸다. 그래, 절에 가기 전에는 그곳에 스님만 있다고 여겼지. 하지만 막상 밤을 보내니 수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절을 유지하기 위해 일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에게 절 구석구석을 안내하고 굳은 몸을 요가로 풀어준 직원도 있었다. 밤이 깊자 법당의 문을 닫으며, 누군가 공양으로 남겨놓은 찰떡을 건네주던 분도 있었다. 하루 세끼 공양간에서 속세에 찌든 입을 위해 건강한 밥을 지어주던 분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 앞에서 제멋대로 뛰어노는 어린 고양이도 그 역할이 있다. 누구든 홀로 와도 적적하지 않게 놀아준다.
짐을 들고나오니 해우소 옆 나무는 꼭대기만 오리 꼬랑지처럼 남겨두고 있었다. 그때야 보였다. 잘린 가지 너머 해우소의 작은 창들이. 저 나무의 잎이 여름 내내 창을 가리는 그늘이 되어주었겠구나. 이제 겨울을 맞이하니 그 창에 햇살을 들이려고 잘라내는구나. 슬근슬근 톱이 춤을 추었고, 푸드덕하고 새가 날듯이 꼭대기의 가지가 떨어졌다. 투두둑 밑동에 부딪히더니, 와사사사 금빛 엽전 같은 잎들을 사방에 뿌렸다. 천년 묵은 나무가 만들어내는 황금빛 장관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 그러나 나는 그 엽전 몇냥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