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경의중앙선 야당역사 근처에 ‘국방예산 감축하고 코로나 19 예산 확충하라’는 진보당의 펼침막이 걸려 있다.
우리에겐 무척 낯설지만, ‘대포 버터’(guns or butter) 논쟁이 있다. 대포(군사비)와 버터(복지) 가운데 어느 것을 중시하느냐, 이 둘 사이의 적정 분기점이 어디인지를 따지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유럽과 미국의 경제학자, 사회복지학자, 정치학자 등이 이 논쟁을 다양한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이 논쟁에 관심이 없다. 남북 분단 상황이라 너무 당연히 버터보다 대포를 중시해왔기 때문이다. 우리와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이 논쟁이 알고 보면 한국전쟁 때문에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동서 냉전이 본격화되고,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졌다. 영국은 한국전쟁에 연인원 8만7천명을 파병하고, 소련에 맞서 대규모 군비 증강에 나섰다. 영국 정부는 1951년 예산에서 늘어난 국방비를 마련하려고 복지비를 줄였다. 무상의료제도인 국민보건서비스(NHS)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일컬어지는 영국 사회복지의 상징이다. 당시 영국 집권당인 노동당은 국민보건서비스 예산을 깎아, 무상이던 안경과 틀니를 이용자 부담으로 바꿨다. 이 결정은 격렬한 논쟁을 불렀다. 영국에선 ‘복지비를 줄여 국방비를 충당하는 당이 노동당이냐’는 반발이 일었고, 노동당 내각 중 장관 3명이 항의해 사임했다. 이후 동서 냉전이 격화되면서 영국뿐만 아니라 서유럽 사회에서 ‘대포 버터’ 논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맨큐의 경제학>에서 버터와 대포의 관계를 기회비용 개념으로 설명한다. 맨큐 교수는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다.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대개 다른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시경제학에서는 이를 ‘대포와 버터 곡선’이란 생산가능곡선으로 설명한다. 더 많은 대포를 만들려면 버터의 생산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냉전 때 소련이 민생을 돌보지 않고 미국과 무리한 군비 경쟁을 벌이다 몰락한 경우가 대포와 버터 곡선의 전형적 사례다.
우리 사회에는 버터보다 대포가 우선이라는 암묵적 전제가 있다. 안보논리가 경제논리를 압도한 결과, 국방비는 절대 깎을 수 없는 성역이 됐다. 단 한번 예외는 있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국방예산이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삭감된 적이 있다. 1998년 13조8천억원에서 1999년에 13조7500억원으로 0.4% 줄었다. ‘단군 이후 최대 위기’란 말이 나올 만큼 경제가 나빠져 더 이상 안보논리로만 국방비를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방비 감축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논의가 이뤄졌다. 당시 재벌 산하인 엘지(LG)경제연구원이 안보 위협이 낮아질 경우 1995년도를 기준으로 국방비는 24.5%, 군병력은 53% 감축이 가능하고, 이를 생산적인 경제 분야에 돌리면 큰 경제적 실익을 얻을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아이엠에프 위기 때보다 어렵다는 아우성이 나오는 코로나19 위기지만, 국방비-민생 관계에 대한 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내년 국방예산안은 53조원에 육박하고 5년 단위로 국방부가 세우는 국방중기계획(2021~25) 예산은 301조원 규모다. 일부 시민단체가 ‘국방예산 감축하고 코로나19 예산 확충하라’고 요구하지만 정부, 정치권, 언론에선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정부가 올해 국방예산 일부를 코로나 19 추경예산으로 돌리자, 안보 공백을 걱정하는 목소리만 분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국회 ‘2021년도 예산안 제출 시정연설’에서 “강한 안보가 평화의 기반이 된다는 것은 변함없는 정부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역설한 강한 안보가 타당성, 현실성 등을 무시한 다다익선식 첨단무기 도입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정부가 도입하겠다는 경함모, 북한 장사정포 요격용 아이언돔 등에 대해 묻거나 따져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평화의 기반이 될 강한 안보’를 뒷받침할 국방력 수준은 국내외 경제사회 여건과 북한 위협, 국제 안보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 정부나 군이 적정 국방력 논의를 독점하지 말아야 한다.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므로 국민의 지지와 공감대를 얻으려면 공론화해야 한다. 이달부터 시작하는 국회의 국방예산 심의가 한국판 ‘대포 버터’ 논쟁의 신호탄이 됐으면 한다.
권혁철 논설위원 nu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