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정수 ㅣ 논설위원
“전경련 회장을 하면서 88올림픽을 유치한 것이 내 생애에서 가장 보람되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정주영 현대 창업주가 1987년 전경련 회장 이임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그가 1981년 5월 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을 맡았을 때 성공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경제인들을 총동원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을 맨투맨식으로 설득해 ‘바덴바덴의 기적’을 만들었다.
“경상수지 흑자로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김우중 대우 회장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으며, ‘500억달러 경상수지 흑자’ 목표를 선언했다. 정부의 연초 전망치는 불과 28억달러 흑자였다. 재계는 수출 총력전을 폈다. 결국 1998년과 1999년 무려 700억달러의 무역 흑자를 달성하며, 외환위기 극복에 기여했다.
이처럼 재계의 리더들은 국가 대사나 위기에 부닥쳤을 때 경제인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 앞장선 전통이 있다. 개인이나 기업의 이익보다 국가와 국민을 앞세우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간혹 비리로 지탄을 받았음에도 국민의 박수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런 전통이 사라졌다. 한국은 지난해 일본 수출규제에 이어 올해 코로나 사태로 연이어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도 그룹 총수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위기 극복에 앞장서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다.
대통령 초대로 청와대에 모여 사진을 찍은 게 전부다. 한 경제단체 임원은 “과거 같았으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부의 규제나 반기업 정서 탓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전에도 있었다.
재계 리더십의 실종은 일차적으로 사람 문제다. 정주영 회장의 카리스마는 “불가능은 없다”는 불굴의 기업가정신이 원천이다. 3세들에게 이런 권위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재계의 조직적 구심점도 약하다. 전에는 재벌 총수 모임인 전경련이 그 역할을 했지만 국정농단 사태로 존재감을 잃었다. 대한상의가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상위 그룹의 참여가 미흡하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리더십 발휘에 바탕이 되는 인식과 철학의 부재다. 총수 개인이나 기업 차원의 단기 이익에 급급하다 보니 국가와 국민까지 폭넓게 보지 못한다. 시대 흐름이나 사회의 변화 요구도 간과한다. 경제발전에 기여하면서도 국민의 부정적 시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국회의원이 하는 말 중에 ‘선당후사’(先黨後私)가 있다. 개인의 안위보다 당을 위해 희생한다는 뜻이다. 경쟁에 이겨서 이익을 남겨야 하는 기업인의 처지가 공직자와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국가 대사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마음가짐은 다를 게 없다.
박용만 상의 회장은 재계에서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드문 사례다. 경제단체는 항상 회원기업의 이해 대변 요구에 시달린다. 하지만 국가경제와 국민의 이익도 함께 보지 않으면 한낱 이권단체로 전락한다. 박 회장은 지난 7년 동안 둘 사이에서 ‘균형추’ 구실을 자처해왔다. 재계의 산업용 전력요금 인상 반대에 찬성하지 않은 이유다. 일본의 수출규제 때도 “일본은 치밀하게 보복하는데 우리는 서로 비난하기 바쁘다”며 단합을 촉구했다. 공정경제 3법도 취지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부작용 방지 대책에 주력한다.
또 한 사람을 꼽는다면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이다. 그는 “기업이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해야 한다”며 ‘사회적 가치 경영’을 주창한다. ‘이에스지’(ESG, 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도 그 일환이다. 심지어 경제적 가치보다 사회적 가치를 우선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기존 시각으로 보면 두 사람은 파격적이다. 하지만 공동체를 생각하고, 미래 비전을 염두에 둔다면 옳은 방향이다. 보수인 국민의힘이 재계가 반대하는 공정경제 3법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긍정적인 것도 변화를 반영한다.
박용만 회장은 내년 초 임기가 끝난다. 최태원 회장은 유력한 차기 회장 후보다. 박 회장의 균형추 역할론과 최 회장의 사회적 가치 경영이 상의를 접점으로 만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최 회장은 4대 그룹 총수 중 최연장자로 ‘형님’ 대접을 받는다.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다.
최 회장은 10월 말 지방 행사에서 “기업인으로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방법을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재계의 리더십 부활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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