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우 ㅣ 서울과학기술대 강사(과학기술학)
유전체(게놈) 정보를 대량으로 분석하는 질병 연구도 늘고 개인 유전자 검사 서비스도 늘면서, 2010년대 들어 유전체 프라이버시 침해 위험에 관한 경고도 늘었다. 연구자가 익명으로 처리한 유전체 데이터베이스에 직접 접근해 개인을 식별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연구논문도 여럿 발표됐다. 누군가 나쁜 마음과 기술을 갖춘다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2013년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에서 미국 연구진은 익명으로 처리된 유전체의 특정 정보를 분석하고서 유전자 계통도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 비교하는 몇 단계를 거치면 그 유전체가 누구 것인지를 상당히 높은 확률로 찾아낼 수 있음을 보여주어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유전체 정보는 금융정보처럼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유전체 프라이버시 문제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
문제는 연구용 유전체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유전체 질병 연구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질병과 의약학 연구를 위해서는 연구용 데이터를 공유해야 하고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서는 접근을 제한해야 하는 딜레마가 생긴다.
딜레마 속에서 길은 있었나 보다. 최근 유전자 발현과 질병을 연구하는 기능적 유전체학이라는 분야에서 유전체 공유와 프라이버시 보호를 둘 다 살리는 방법이 제안됐다. 미국 예일대학의 마크 거스틴 교수(생물정보학) 연구진은 기능적 유전체 데이터베이스에서 개인을 식별해주지만 연구엔 쓸모가 적은 변이 정보를 찾아내고서 그 정보를 가려주는 파일 저장 기법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논문은 생물학저널 <셀>에 실렸다.(doi.org/10.1016/j.cell.2020.09.036)
이번 성과는 기술 사용 단계에서 윤리와 책임을 강조하는 방식과 달리, 기술 자체에 프라이버시 보호의 안전장치를 설계해 집어넣었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방법이 얼마나 일반적인지 효과적인지는 사후평가가 뒤따라야 하지만, 연구진이 해법을 찾기까지 남이 주목하지 않은 한 우물을 파면서 오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온 점은 인상적이다.
언론 보도와 자료를 찾아보면, 연구 과정에서 연구자들의 마음 부담은 적잖았을 듯하다. 연구책임자 거스틴 교수는 개인 유전체 정보가 누출될 위험을 입증하고 경고하면서 주변에선 일부 눈총도 받아야 했다고 한다. ‘과학 발전의 발목을 잡지 말고 도움 되는 연구를 하라’는 식의 말도 들었을 법하다. 하지만 프라이버시 보호는 기술의 신뢰성을 높여주고, 그래서 안전한 기술의 효용을 더 높여줄 수 있다. 유전체 공유와 프라이버시 보호의 균형을 찾는 기술을 찾아 나선 이들 연구실에서 이번 <셀> 논문은 스스로 자랑스러운 결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