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오른쪽)가 2019년 12월 ‘제7회 리영희상’ 시상식에서 백영서 리영희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상을 받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김소연 ㅣ 도쿄 특파원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지난 11월21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우에무라 기자와 <아사히신문>의 날조가 사실로 확정됐다는 것이네요”라는 글을 올렸다. 이틀 전 나온 재판 기사를 첨부하면서 덧붙인 말이다. 우에무라 다카시(62)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자신의 기사를 날조라고 비방해온 우익 인사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 관련 소송에서 5년 넘게 다툰 끝에 최종 패소했다. 이 재판은 명예훼손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이지, 우에무라가 쓴 기사가 날조라고 판단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베 전 총리는 ‘우에무라=날조기자’라고 공개적으로 저격했다. 일본 최장기 총리라는 유명세에 팔로어 수가 60만명이 넘는 아베 전 총리의 글은 사회적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다.
우에무라는 참지 않았다. 거짓 정보가 사실처럼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에무라 쪽은 “글을 삭제하지 않으면 법적 조처를 하겠다”고 내용 증명을 보냈다. 열흘 뒤, 아베 전 총리의 글은 조용히 삭제됐다. 우에무라는 “제 기사가 날조가 아니라는 것이 다시 확인됐다”며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우에무라가 강하게 나선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1991년 8월11일 <아사히신문>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1997년 작고)의 증언을 처음으로 보도한 기자다. 기사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의기억연대 전신)가 김 할머니를 만나 녹음한 내용을 근거로 썼고, 익명으로 보도됐다. 김 할머니는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14일 기자회견에 직접 나와 피해사실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피해 당사자의 기자회견이 이뤄지면서 당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우에무라의 첫 보도는 23년이 지나 논란이 되는 기이한 상황이 발생했다. 2014년 1월 발행된 주간지 <주간문춘>(슈칸분슌)이 ‘위안부 날조 <아사히신문> 기자가 여자대학 교수에’라는 기사를 보도하면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됐다. 이른바 ‘좌표 찍기’로 협박이 계속됐다. “반드시 죽인다”, “딸을 이지메합시다.” 가족은 물론 새로 이직하게 될 대학, 현재 몸담고 있는 직장을 대상으로 우익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이 가해졌다. 결국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예정이던 대학과의 계약도 취소됐다.
우익들이 기사를 날조라고 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다. 위안부를 설명하면서 정신대라고 표현했고 그들이 강제연행됐다고 썼다는 것이다. 이 기사 때문에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망신을 당했다고 몰아붙였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정신대와 위안부라는 용어를 혼용해서 썼고, 기사에는 ‘속아서’라고 언급돼 있을 뿐 강제연행이란 말은 없다. 애초부터 사실보다는 위안부 문제를 ‘피해자 관점’에서 거론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2012년 12월 재집권을 한 아베 전 총리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를 흠집 내기 시작했고, 극우세력을 중심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움직임이 강했던 시기다.
지난 28일 한·일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한 지 5년이 됐다. 일본은 언제나처럼 이 문제는 모두 끝났다고 강조했다. 위로금도 주고 아베 전 총리 차원의 사과도 표명했으니 그만 좀 하라고 다그친다.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전한 우에무라를 날조 기자로 만들려는 집요한 공격을 보고 있으면 과연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인가, 이것이 사죄를 한 나라의 모습인가 의구심이 든다. 한국에서 외교적 파장을 우려하면서도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선 것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많은 데는, 진정성과 일관성이 결여된 일본의 태도도 한몫을 한다. 소송의 1심 판결은 1월8일과 13일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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