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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이 나라는 관료의 나라가 아니다 / 손원제

등록 2021-01-26 17:21수정 2021-01-27 02:41

정세균 국무총리(왼쪽)가 26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참석한 국무위원들과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오른쪽은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연합뉴스
정세균 국무총리(왼쪽)가 26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참석한 국무위원들과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오른쪽은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연합뉴스

손원제 ㅣ 논설위원

“이 나라가 기재부 나라냐?”

최근 쏟아진 정치권의 ‘말·말·말’ 중 개인적으로는 가장 흥미로웠던 발언이다. 정세균 국무총리의 이 범상치 않은 발언이 나온 경위를 찾아봤다. 정 총리는 지난 20일 아침 <문화방송>(MBC) 라디오에 나왔다. “(정부가 방역 목적으로 영업을 제한하는 경우) 합법적으로 보상할 수 있는 그런 길이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님과도 여러번 논의해서 공감대가 만들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한 제도화를 적극 추진할 작정이다.” 코로나19 영업제한 조처로 벼랑 끝에 몰린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피해 보상을 법제화하는 방안을 찾아보라고 기획재정부에 지시한 사실을 공개했다.

몇시간 뒤 비상경제중앙대책본부 회의가 열렸다. 브리핑에서 김용범 기재부 1차관은 “(코로나 손실 보상을) 법제화한 나라는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총리가 대통령과 공감대를 이뤘다고 밝힌 ‘영업손실 보상 법제화’에 대해 우회적으로 반대한 것이라는 풀이가 나왔다. 이 회의는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주재했다. 기재부의 집단 의지가 깃든 발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정 총리는 김 차관의 발언을 보고받고 격노했다고 한다. “이 나라가 기재부 나라냐”고 질타한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도록 했다. 이날 저녁엔 <연합뉴스티브이>에 출연했다. “헌법 정신에 따라 그런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는 게 제 판단”이라며 쐐기를 박았다. “개혁을 하는 과정엔 항상 저항 세력이 있다”며 기재부를 개혁 저항 세력에 빗댔다.

다음날 기재부가 꼬리를 내렸다. 김용범 차관은 21일 “총리 지시 말씀대로 준비를 충실히 하겠다”며 “해외 제도를 소개한 것인데, 반대하는 것으로 비쳤다”고 말했다. 다만 꼬리 토막은 남았다. 홍 부총리는 22일 “보상 제도화에 참여하겠다”면서도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라고 토를 달았다.

최종 결론은 대통령이 지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5일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손실 보상을 법제화하는 방안을 당정이 검토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보상 법제화’를 명토 박으면서 기재부의 우려 또한 반영했다.

‘개혁 저항 세력’ 등의 발언이 총리로서 지나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과연 그럴까? 기재부가 세계에서 가장 건전한 수준인 우리 재정을 두고 줄곧 앓는 소리만 해온 것은 재론할 필요도 없다.

“최규하 총리의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의료보험 도입을 반대하는 경제부처 장관들을 모두 부른 자리에서 최 총리에게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교수들도 의료보험부터 하라고 하니까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하세요’라고 지시했다. 최고 통치자와 장관들의 생각이 이렇게 달랐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쓴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의 한 대목이다. 경제 관료들이 반대하는 의료보험 도입을 위해 총리 직속 위원회를 만들어 일주일 만에 찬성 보고서를 내게 한 일화를 담았다. 김 위원장은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선 “본질은 살피지 못하고 표면에 드러난 문구 몇개에만 집착하는 관료들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뒤 쓴 글 ‘참여정부는 관료주의에 포획되었나’는 “관료들은 정치권력 못지않은 막강한 권력”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런 대목도 있다. “이거 하나는 내가 좀 잘못했어요. (…) 예산안을 가져오면 색연필 들고 ‘사회정책 지출 끌어올려’ 하고 위로 쫙 그어버리고, (…) 지금 생각하면 무식하게 했어야 되는데 바보같이 해서….”

손실 보상은 민생은 물론 방역 성공에도 절대적 요인이다. 자영업자들이 더 못 버티겠다며 방역지침을 거부하기 전에 길을 터줘야 한다. 곳간을 채워온 건 이럴 때 쓰라는 것 아니었나. 이 절박한 민심을 관료적 타성에 밀려 외면한다면 그야말로 ‘이 나라는 관료들의 나라’일 것이다.

정 총리의 발언은 정책을 넘어 정치적 효과 또한 노렸을 것이다. 민생·방역에 뚜렷한 족적을 새김으로써, 잠룡으로서 존재감을 보여주고자 했을 터이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사면론’ 패착 여파가 짙다. 이익공유제는 ‘보상 법제화’만큼 수혜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 정 총리가 대체재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이 대표가 반전 계기를 잡을지는 누가 더 민심에 확 다가가는 민생 성과를 주도할 것인지에 좌우될 것이다.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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