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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싸가지 없던 미국 기자의 추억 / 권혁철

등록 2021-01-28 17:35수정 2021-01-29 02:40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이 지난 27일(현지시각) 워싱턴의 국무부 청사에서 취임 뒤 처음으로 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이 지난 27일(현지시각) 워싱턴의 국무부 청사에서 취임 뒤 처음으로 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해마다 10월이면 한국과 미국은 서울이나 워싱턴에서 국방장관 회담을 한다. 이 회담을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SCM)라고 하는데, 2008년 10월에는 워싱턴에서 열렸다. 당시 ‘훼손된 한-미 동맹 복원’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라서 한-미 관계 현안이 많았다.

당시 국방부 출입기자였던 나는 이 회담을 취재하러 워싱턴 출장을 갔다. 2008년 10월17일(현지시각) 미 국방부(펜타곤) 프레스룸에서 양국 국방장관 합동기자회견이 열렸다. 나를 포함한 한국 기자들이 미 국방장관에게 한-미 동맹 현안을 직접 질문할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한국 기자들은 전시 작전권 전환, 주한미군 감축, 핵우산을 포함한 미국의 확장 억지, 한·미 연합연습 지속 여부 등을 양국 장관에게 돌아가며 물었다. 그런데 기자회견에 참석한 미국 기자들은 로버트 게이츠 미국 장관에게만 질문을 쏟아냈다. 미국 기자들은 한-미 관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기자회견 내내 당시 미국 현안이던 아프가니스탄전쟁에 대해서만 꼬치꼬치 물었다.

나는 처음에는 ‘명색이 한-미 국방장관 합동기자회견인데, 미국 장관에게 아프간 문제만 질문한 미국 기자들이 싸가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해가 갔다. 미국 기자라면 언제 어디서든 미국 시민들이 궁금한 내용을 묻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엄청난 관심사인 한-미 동맹 현안이 미국 기자들이 보기엔 그저 그런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 간격으로 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의 발언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첫 기자회견이 있었다. 정의용 후보자는 28일 오전 출근길에 기자들에게 “한-미 동맹 관계는 우리 외교의 근간입니다”라고 말했다. 한-중 정상통화가 한-미 동맹 경시 논란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말로 들렸다. 블링컨 장관은 27일(현지시각) 오후 국무부에서 첫 언론 브리핑을 했다. 브리핑에서 기자 7명이 질문했는데 첫 질문이 ‘가장 우선순위를 두고 재검토하는 외교정책이 뭐냐’였다. 블링컨 장관은 ‘특히 예멘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어진 질문 6가지는 러시아, 중동, 아프간, 중국, 중국과 이란, 국제사회에서 미국 리더십 회복 관련 내용이었다. 이날 브리핑에서 한반도 문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블링컨 장관의 브리핑 스크립트를 읽으며 13년 전 펜타곤 기자회견 장면이 떠올랐다.

지난해 11월 미 대선 이후 국내에서는 바이든 정부 외교안보정책을 다룬 학술·정책 토론회가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 참석한 전문가 대부분은 북-미 관계, 한-미 관계를 중심으로 바이든 외교안보정책을 분석한다. 국내 언론들은 지난 19일 블링컨 국무장관 상원 인준 청문회 때 ‘대북 정책을 리뷰하려고 한다’는 그의 발언을 크게 다뤘다.

그런데 인준 청문회 전체 내용을 보면 북한 비중은 너무 미미했다. 한 외교관이 블링컨 청문회 단어 빈도를 분석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이 흥미롭다. 블링컨 발언과 의원들과의 질의응답을 포함하면 청문회 전체에서 언급된 단어(제목 포함)는 모두 3만8257개였다고 한다. 질의응답 비중으로 따지면, 중동(아프간 포함) 관련 단어가 약 1만2000개(31.4%)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중국(대만, 홍콩 포함) 관련 5660단어(14.8%) △유럽 및 러시아(군축 포함) 4530단어(11.8%) △코로나19 950단어(2.5%)였다. 미 국무부 개혁, 중남미, 아프리카, 개발 원조 등이 38%였다. 북한 관련 단어는 500개(1.3%)에 불과했다. 이날 청문회에서 오간 백마디 중에 한마디가 북한이었다.

미국 외교가 중동과 유럽, 중국에 쏠려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동안 미국 새 정부가 출범하면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한 것도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바이든 정부 초기에는 북한이 이런 도발을 않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한-미 협의를 통해 미국의 한반도 문제 우선순위를 빨리 끌어올려야 한다. 앞으로 남북이 미국을 잘 설득하려면 한반도나 동북아 차원을 넘어 중동·유럽 문제까지 시야를 넓혀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특히 북한 당국자들은 “세계가 조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이 세계 속에 있다”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의 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권혁철ㅣ논설위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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