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화된 맞춤법을 없애자고 했더니 말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았다. 구구단을 다 외웠으면 벽에 붙여놓은 구구단표를 떼어내야 한다. 현대적 말글살이를 위해 한걸음만 내딛자.
성문화된 규범이 없어도 표기의 질서는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다. 성문법이 없는 절대다수 국가가 이를 보여준다. 한글 맞춤법은 공통어의 형성이라는 근대 민족국가 건설의 과제와 일본 제국주의의 언어말살 정책에 맞서 민족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과제가 겹친 시기에 제정되었다. 변변한 사전도 없고 합의된 표기 방법도 없던 상황에서 이룬 커다란 성취다.
현행 맞춤법의 대원칙은 ‘(1)표준어를 (2)소리대로 적되 (3)어법에 맞도록’ 쓴다는 것이다.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이라는 원칙은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되어 우리를 괴롭히지만, 다른 표기 방안보다 여러모로 낫다. ‘갓흔’(같은), ‘바닷다’(받았다)처럼 소리 나는 대로 적자던 조선총독부의 ‘언문철자법’(1912)이나 이승만의 ‘한글 간소화 방안’(1954)에 비하면 한국어의 특성을 합리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그 결과 맞춤법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독보적 원리로 정착되었다. 문화적 무의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공적 영역을 유지하기 위한 실천적 습관(아비투스)이 되었다. 다음 세대에서도 유지될 것이다. 즉, 역사성과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러니 겁내지 말자. ‘꼿밧에 안자 잇는 옵바’(꽃밭에 앉아 있는 오빠)라 쓴 책이 팔리겠는가.
문제는 ‘표준어’다. 맞춤법을 없애자는 주장은 결국 ‘표준어’를 없애자는 것이다.(다음 주에 이어서)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