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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불가능을 요구하는 ‘휠체어 오큐파이’ / 안영춘

등록 2021-02-16 18:44수정 2021-02-17 02:40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제공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제공

안영춘 ㅣ 논설위원

설 연휴의 여유를 누리려는 마음들이 부산해지기 시작하던 지난 10일 오후 3시 무렵, 서울 지하철 4호선에서 사달이 났다. 종점인 당고개역을 출발해 35분이면 서울역에 도착해야 할 열차의 운행 시간이 2시간30분으로 탄성 잃은 고무줄처럼 늘어졌다. 장애인권단체 활동가 100여명이 역마다 타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보행장애인이 다수였고, 휠체어가 장사진을 이뤘다. 지하철의 ‘정상’ 운행은 ‘불가능’했다.

주류 언론은 다들 무관심했다. 사람이 개를 무는 ‘비정상’보다 사소해 보여서였을 수 있다. 그러나 승객들 처지에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었고, 더러는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귀성열차를 놓쳤을 터다. 솔직히 내가 그 처지였다면 휠체어 행렬 앞에서 장애 없는 두 다리를 동동거리며 장애인을 비하하는 육두문자를 속으로 삼켰을지 모른다. 하지만 치안의 막장 같던 이날 풍경 속에 ‘불법’은 달리 없었다.

장애인의 지하철 단체 이용을 금하는 ‘법’은 없고, 정차에 맞춰 타고 내리는 건 각자 자유다. 어떤 법은 지키는 게 외려 비정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지하철 노동자들은 임단협 때면 ‘준법투쟁’이란 걸 한다. 여기에서 준법은 법을 어기지 않는 게 아니라, ‘문헌대로’ 이행하려고 사투를 벌이는 거다. 규정대로 속도와 개문 시간을 지키면 정상 운행이 불가능하다는 건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가 가장 잘 안다.

이날 장애인들의 집단행동은 서울시더러 약속을 문헌대로 이행하라고 요구하는 준법투쟁이었다. 서울시는 저상버스와 지하철역 엘리베이터를 늘리기로 약속한 일정을 뭉개고 있다. 하지만 서울교통공사의 누적적자는 얼마며, 서울시가 시내버스회사에 지급하는 보조금은 얼만가. 장애인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려면 재정 거덜 나는 건 시간문제다. 서울시가 화수분은 아니지 않은가. 맞다. 다만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했던 말이다.

불가능을 요구하면 안 되는가. 이날 장애인들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점잖게 타이르는 목소리도 없진 않았다. 그런 방식은 반발을 부를 뿐이다, 플랫폼에서 얌전히 손팻말 들고 있는 ‘공존의 기술’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장애인 이동권은 자분자분 설명하는 방식으로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사람이 개를 물 때보다 더 큰 욕을 먹으며 집단행동을 해야만 언론이 관심을 보였고, 비로소 엘리베이터가 놓이고 저상버스가 도입됐다.

집단행동 전에 고독한 죽음이 있었다. 보행장애인 김순석이 1984년 9월 서울시장 앞으로 편지를 남긴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휠체어를 타고 찻길을 건너는 것은 물론 인도를 오가는 것도 제힘으로 불가능했다. 생계로 이어지는 길은 모두 턱과 계단으로 끊겨 있었다. 불가능을 요구한 장애인의 목숨 값으로 서울 거리와 건물에 경사로가 설치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시의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얼마 전 에스엔에스엔 지하철역 엘리베이터 앞에 비장애인들이 길게 늘어선 줄 맨 뒤로 휠체어 장애인이 기다리고 있는 사진이 올라와 화제가 됐다. 지하철역 엘리베이터와 저상버스의 편익은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이 훨씬 많이 누린다. 누구 비난하고 말고 할 일은 아니다. 필요한 만큼 비용을 십시일반 하고 목적에 맞게 쓰도록 뜻을 모으면 족하다. 그게 육두문자 주고받아도 허물없는 ‘공존의 기술’ 아닐까.

장애와 비장애의 범주는 시대마다 달랐고, 한 개인의 생애주기 안에서도 유동한다. 후천적 장애가 아니더라도, 나이 듦 자체가 장애의 경계를 넘어가고 교차하는 과정이다. 변하지 않는 건 ‘비장애 중심주의’뿐이다. 비장애 중심주의는 세상 모든 것을 장애와 비장애, 정상과 비정상, 가능과 불가능,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고정되고 위계적이며 차별적인 이분법으로 환원하고 마는 고질적인 강박이다.

영화 <나는 보리> 포스터
영화 <나는 보리> 포스터

영화 <나는 보리>(2018)에서 초등학생 보리는 가족 넷 가운데 유일한 청인이다. 자신도 농인이 되기를 바라며 제 귀를 괴롭히고, 농인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혼자 청인이다 보니 가족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낀 거다. 비장애 중심주의의 본질을 정확히 되비추는 거울상이다. 보리는 소외감을 극복하고 다시 청인으로 돌아와 가족 안에서 위치를 잡고 관계를 구성한다. 보리‘들’이 다수가 되는 불가능을 요구하며, ‘휠체어 오큐파이’는 계속돼야 한다.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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