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필규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수년 전 일부 이슬람교도들이 사실상 그들의 종교만을 이유로 ‘반한단체’ 구성원으로 몰린 사건이 있었다. 한 뉴스는 알카에다 훈련 영상과 함께 이 사건을 보도했고 우리는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몇달 뒤 어렵게 이들과 연락이 닿았고 법률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그냥 귀국하겠다고 했다. 제주에서 예멘 난민들의 존재가 뉴스가 되었을 때 이슬람혐오가 극에 달했다. 정부는 사실상 이를 방치했고 기껏해야 ‘국민이 먼저다’라는 이슬람혐오주의에 대한 ‘국민의 안전이 먼저다’라는 또 다른 혐오주의로 답했을 뿐이다.
종교시설 중 수많은 교회가 주거밀집지역에 있다. 예배도 드리고 찬송가도 부르고 교인들이 모여서 여러 행사와 모임을 한다. 그런데 주민들은 유독 이슬람 사원만은 주거밀집지역 반경 1.5㎞ 내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기존 건축허가도 취소되어야 한다고 사방에 펼침막을 내건다. 주민이 아닌 이들도 상당수 가세한 듯하다. 무차별적인 혐오표현, 가짜뉴스가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다. 대구 북구에 건축 예정인 이슬람 사원에 관한 얘기다.
구청장 탄원서는 이슬람 사원의 소음, 냄새, 무서움, 집단적 의식행위 등으로 주민들의 불만요소가 쌓이고 있다고 한다. 사원을 거점으로 한 이슬람인들의 횡포로 주민들의 생존권과 행복추구권이 박탈당할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한다. 주민들의 정서불안, 재산권 박탈과 동네의 피폐화, 슬럼화 우려를 제기한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심지어 대학생과 초등학생이 공존하는 곳에서 이슬람 사원의 홍보 극대화를 가져올 수 있어 그 건립을 반대한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관할구청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건축주 쪽에 공사 중지를 구두로 통보했고 다시 건축주와 주민 간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공사를 중지한다는 명령 공문을 발송했다. 건축규모 축소, 주민 불만인 ‘악취’(!) 제거 시설 설치 합의 등을 조율하겠다고 했다가 사인 간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도 한다.
오히려 이슬람교도들은 “다른 문화에 대한 불안감 등 주민의 의견을 존중한다. 주민들과 이야기해서 잘 해결하고 싶다”라는 소수자로서 충분히 위축되고 억압된 답을 내놓고 있다.
이 정도가 되면 전세계적으로도 흔히 보기 어려운 야만적 수준의 혐오와 차별이다. 6년 이상 이미 이슬람교도들이 모여서 종교의식을 행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미 대구 다른 곳에는 주거밀집지역 안에 이슬람 사원이 있다. 몇년 전 주민들의 반발을 이유로 인천 남구가 완공을 앞둔 이슬람 사원의 건축허가를 취소했다가 판결을 통해 뒤집히는 사건도 있었다. 대구 북구청의 조치와 입장은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고 헌법에 반해 종교의 자유를 노골적으로 침해한다.
국제인권기준도 종교의 자유가 종교와 관련하여 예배하거나 집회할 자유, 그리고 이런 목적을 위한 장소를 설치하고 유지할 자유를 포함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 자체가 보장되지 않는 전체주의 국가 외에 특정 종교에 대한 혐오를 이유로 관련 시설의 건설 자체가 저지되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다.
이런 ‘혐오국가’의 현장에서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소위 이슬람 국가에서 무엇을 판다, 무엇을 짓는다는 자랑은 자주 늘어놓는데 이들은 단지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대상에 불과한 것인가. 평등법 등 차별금지의 선봉에 서 있다는 국가인권위원회는 어떠한가. 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면 직권으로라도 개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국회는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점점 강해지는 혐오의 흐름에 대한 입법적인 대책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관할구청에서도 혐오와 차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다름에 대한 이해는 모두에게 힘이 되고 연대로 나아갈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모두가 어떤 측면에서는 소수자이고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할 때 그 사회는 희망이 있다. 편안함을 경계하고 불편함을 직시할 때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관할구청 누리집의 구청장 인사말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행복한 삶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개인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소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좁혀 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