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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꼬우면 이직하든가’의 공정성 / 안영춘

등록 2021-03-16 18:10수정 2021-03-17 02:41

경기도 성남시 한국토지주택공사(LH) 경기지역본부 모습. 연합뉴스
경기도 성남시 한국토지주택공사(LH) 경기지역본부 모습. 연합뉴스

안영춘 ㅣ 논설위원

나는 요즘 치밀하게 연출된 몰래카메라에, 그러니까 성착취 동영상이 아니라 30년 전 어름에 개그맨 이경규가 인기몰이했던 그 몰카에 혼자 속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든다. 한국토지주택공사(엘에이치) 내부자들의 땅 투기 의혹에 대한 한국 사회의 집단 분노와 관련돼 있다. 발본색원, 일벌백계, 투기수익 몰수, 물샐틈없는 방지 대책의 필요성에 이백 퍼센트 동의한다. 그러나 집단 분노의 수위나 밀도와는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혹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지 않을까 부러 분노를 표출하는 순간, 나를 향해 일제히 “속았지” 하며 박장대소할 것만 같다.

참여연대와 민변이 엘에이치 내부자 10여명의 광명·시흥 신도시 예정지 투기 정황을 처음 폭로했을 때, 한국 사회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듯 경악했다. 육하원칙의 완성도에 차이가 있기는 하나, 당장 2019년 창릉 신도시 계획이 발표됐을 때 나왔던 비슷한 의혹을 떠올리는 게 어렵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러곤 채 열흘이 안 돼 정부 합동조사단이 국토부와 엘에이치 임직원 등 1만4천명을 조사해 7명의 투기 의심 사례를 추가로 발표하자, 이번엔 ‘국민을 바보로 아느냐’는 반응 일색이었다. 한국인의 학습능력이야 정평이 났지만, 백지상태에서 그 짧은 시간에 어둠 속 진실을 꿰뚫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엘에이치 사태’에 대한 백지의 무구함과 현자의 통찰이 임의롭게 하나의 집단 여론을 형성하는 걸 보면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든다. 당신은 이제껏 선출직 공직자와 직업 공무원, 공공기관 종사자의 부동산 청렴도를 신뢰하지 않았고, 장관 후보자의 다주택과 위장전입 문제가 인사청문회의 레퍼토리가 된 지 오래임을 잘 알고 있다는 데 내기를 걸 수 있다. 물론 몇달 전에도 국회의원들이 집값 급등 지역에 집을 여러 채 갖고 있다는 기사도 접했을 거로 본다. 그러면 왜 양과 질 모두에서 지금은 반응이 사뭇 다른 걸까.

‘공정성 신화’에서 답을 찾을 수 없을까. 신화가 신화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외적 존재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에게 공정성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신화 체계는 또한 현실 세계의 반영이다. 재벌가 자녀의 특채 입사와 초고속 승진, 경영권 상속은 자연법칙과도 같다. 지체 높은 이들은 애초 공정성 외부의 존재다. 공정성은 평민들끼리의 규범이다. 평민은 그 규범 안에서 살고, 그 규범으로 생사를 다툰다. 국회의원 토지 전수조사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저들끼리의 정쟁에서 튀어나온 돌출물에 가깝다.

국회의원 전수조사를 해도 ‘엘에이치 사태’라는 이름이 바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 지체 높은 집단의 이름이 붙으면 공정성의 프레임이 협소해지거나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어떻게든 공정성의 문제여야 하는 것이다. 일개 공사 직원들이 우리는 꿈에도 모르는 내부정보를 이용해 불로소득을 노림으로써 공정한 시장 질서를 짓밟은 천인공노할 사건.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그들의 죄는 내부정보를 이용한 데 있는가, 아니면 불로소득을 노린 데 있는가.

부동산 문제에서 투자와 투기의 차이가 임의적이라면 소득과 불로소득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한사코 차익을 보지 않을 목적으로 투자하는 경우만 아니라면, 엘에이치 내부자들의 죄는 내부정보를 이용한 데 있다고 답하는 게 맞다. 또한 외부에서 우연히 내부정보를 취득해 투자한 경우라면 정당성을 주장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봐야 한다. 물론 대놓고 말하기가 꺼려질 수는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구한 존재의 보호색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불로소득이 뭐예요?”

경찰이 에스엔에스 익명게시판에 ‘꼬우면 우리 회사로 이직하든가’라는 글을 올린 사람을 추적하고 있다.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및 형법상 모욕, 업무방해 혐의를 받는다니, 국사범급이다. ‘꼬우면 이직하든가’는 그 나름의 공정론이다. ‘공정성의 막장’이라는 블랙코미디를 연출한 공로만큼은 인정했으면 한다. 불로소득의 시스템을 놔둔 채 공정성에만 핏대 올리는 투자자와 이 국사범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을 수 있다. 반면 공정성의 머니게임에 들지 않는(못하는), 신과 정반대편의 또다른 예외적 존재들과의 거리는 까마득하다. 그래서 나는 이 압도적인 분노가 께름칙하다.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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