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준범ㅣ워싱턴 특파원
내가 살고 있는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카운티의 교육청에서 안내 이메일을 받고 깜짝 놀랐다. 집 근처에 있는 한 중학교에서 한 학생이 방과 후에 혼자 있는데 4명이 다가와서 침을 뱉고 반아시아계 인종주의적 욕설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16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한인 4명 등 아시아계 여성 6명을 포함한 8명의 사망자를 낸 총격 사건으로 뒤숭숭한 상황에서 접한 소식이라 더욱 심란해졌다.
미국 사회에서 소수 인종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미국 건국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뿌리가 깊다. 미 대륙에 터 잡을 때부터 시작한 원주민·흑인 노예제는 말할 것도 없고, 19세기 중국인의 입국을 금지한 중국인 배제법, 2차 대전 때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 등 아시아계에 대한 차별도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지난해 코로나19 와중에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중국 바이러스” 조롱은 이 같은 역사적 바탕 위에서 아시아계 혐오 분위기를 강화하는 기름이 됐다.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 사례 신고를 받는 ‘아시아·태평양계(AAPI) 증오를 멈춰라’는 지난해 3월부터 지난달까지 신고 건수가 3795건에 이른다고 집계했다. 캘리포니아주의 한 시민은 상점에서 한 남성 노인이 얼굴을 찌푸리면서 “우리는 너희 나라 회사들을 목록에서 지웠고 학생들도 되돌려보냈는데, 너는 여기서 쇼핑을 하고 있구나. 너의 시민권을 빼앗겠다”고 말했다고 신고했다. 버지니아주의 한 여성은 지하철역에서 한 남성이 자신의 등을 때린 뒤 기침하는 흉내를 내고 중국을 언급하면서 욕을 했다고 신고했다.
애틀랜타 총격은 이처럼 미국에 아시아계 혐오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는 가운데 터졌다. 수사 당국은 이번 사건을 아시아계 증오범죄로 볼 단서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만, 희생자의 대부분이 아시아계 여성인 이번 사건을 미국 사회의 아시아계 차별 분위기와 떼어내서 보기 어렵다. 미국 내 아시아계는 이번 일을 아시아계 혐오·차별의 심각성을 알리고 이를 없애는 모멘텀으로 삼으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애틀랜타 총격 사건을 규탄하는 집회들에는 아시아계와 흑인, 백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고루 참여하고 있다.
트럼프 때와 달리 조 바이든 시대에는 뭔가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취임 직후 인종 불평등 해소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한 바이든은 이번 사건에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걱정을 안다”고 공감을 표하고 증오를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워싱턴 집회에서 만난 흑인 남성은 “지난해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 때는 경찰이 공격적으로 진압할까 두려워 현장에 나가지 않았다”며 “지금은 다르다. 정부가 바뀐 것은 중요한 차이”라고 말했다. 미 연방의회에 4명의 한국계 하원의원 등 아시아계 상·하원 의원이 20명 가까이로 늘어난 것도 긍정적 측면이다.
이번 일이 지난해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때와 같은 대규모의 인종차별 반대 운동으로 확대될지는 알 수 없다. 총격범의 범행 동기가 인종주의라고 아직 볼 수 없다는 당국의 설명이 아시아계의 집단행동을 주저하게 하는 큰 요인일 것이다. 미국 인구의 약 6%를 차지하는 아시아계가 각각의 언어와 문화적 차이를 넘어 하나로 뭉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이 “아시아계 증오를 그만두라”는 목소리를 키울 적기라는 점은 틀림없다. 미국 내 아시아계가 하나로 손잡고, 나아가 히스패닉, 흑인, 백인과도 연대해 차별과 혐오는 설 땅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시험대이기도 하다. 오늘 당장 내 일이 아닐 수 있어도, 다음 세대의 얼굴에 누군가 침을 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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