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여쁜 약자’와 ‘돕고 싶지 않은 약자’를 구분하고 달리 대하는 태도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학대 피해 아동이 어리고 연약한 이미지일수록 순진무구한 희생자인 아이에 대한 연민과 가해자에 대한 공분이 높다. 하지만 학대 피해 아동이 스스로 집을 나오는 방식으로 폭력에 맞서거나 그 과정에서 과실을 저지르기라도 하면? ‘비행 청소년’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경계한다.
김희경의
점선의 연결
아동학대와 가족주의에 관한 책을 쓴 뒤 부모의 학대를 겪었던 이들과 종종 연락이 닿는다. 어릴 때부터 당한 끔찍한 학대에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낸 사람들. 나는 그들을 학대 피해 생존자라 부른다. 현서(가명)도 그중 한명이다.
“크고 나서야 학대가 사랑이 아니란 걸 알게 된” 현서가 집을 나온 뒤 맞닥뜨린 가장 큰 장벽은 주거 문제였다.
지원제도를 알아봤지만 “엘에이치(LH) 전세대출이며 주거급여며 재난급여까지 모든 조건에서 그는 부모에게 최선의 양육을 받는 피양육자로, ‘부모의 소득'이 포함된 존재로 전제”됐다. 부모의 학대로 독립했다고 설명해도 1년 뒤면 사라지는 경찰 신고서들을 떼오라는 말을 들었다. 정신과 진료기록이나 학대를 인정하는 부모와의 대화 등은 증명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너무나도 힘들고 아픈 사람들에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온갖 증명을 요구해서 지치게 만들어버리는” 복지제도의 벽 앞에서 그는 더 싸울 힘도 없어 포기했다고 한다.
대신 부모와 연을 끊고 독립한 사람들의 노하우를 찾다 알게 된 공개채팅방에서 그가 들은 독립의 방법은 여성들의 성매매 경험담이었다. 찜질방을 전전하다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궁지에 몰렸을 때 마지막 선택지였다는 것이다. 삶의 시작부터 꼬인 청소년들이 그렇게 생존 때문에 ‘비행’의 경계를 넘거나 범죄의 대상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이 양지의 관심사가 될 리 있겠냐며 현서는 덧붙였다.
“약자 중에도 어여쁘고 돕기 좋은 약자와 돕고 싶지 않은 약자가 따로 있는 거 같은 느낌도 너무 많이 듭니다. 그래서 유독 계모의 학대를 받아 숨진 어린 딸 같은 이미지를 강조하는 거겠죠. 실제론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 아님에도요. 한국인들은 부모가 자식을 괴롭힐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길 매우 껄끄러워하니까요.”
그의 말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알게 모르게 ‘어여쁜 약자’와 ‘돕고 싶지 않은 약자’를 구분하고 달리 대하는 태도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학대 피해 아동이 어리고 연약한 이미지일수록 순진무구한 희생자인 아이에 대한 연민과 가해자에 대한 공분이 높다. 최근 일부 언론은 그런 대중심리를 악용해 숨진 아이의 사진을 무단 공개하고 ‘이렇게 예쁜 아이를’ 따위의 제목을 붙이는 횡포를 저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학대 피해 아동이 스스로 집을 나오는 방식으로 폭력에 맞서거나 그 과정에서 과실을 저지르기라도 하면? ‘비행 청소년’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경계한다. 학대에 시달리는 연약한 아이와 살길을 찾으러 집을 탈출한 청소년은 삶의 다른 단계에 있는 같은 사람일 수 있는데 말이다.
심지어 이런 구별 짓기는 정책에도 스며 있다. 예컨대 부모에게 반복되는 학대를 받고 방임된 15살 소년이 있다고 해보자. 이 소년을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이 ‘구출’하고 더는 부모의 양육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면, 보건복지부 관할의 ‘요보호 아동’으로 정부가 부모를 대신해 보호하고 자립시키는 정책의 대상이 된다.
반면 같은 소년이 ‘그래도 내 부모인데’ 하는 마음으로 신고하지 않고 버티거나 경찰에 신고해도 ‘네가 잘못했네’처럼 일축하는 말을 듣다가 더는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집을 나오면, 여성가족부 관할의 ‘위기 청소년’으로 가정복귀, 사회적응을 목표로 한 정책의 대상이 된다. 지원 내용에도 큰 차이가 있어서 ‘위기 청소년’의 자립을 위한 지원은, 역시 부족한 형편인 ‘요보호 아동’의 자립 지원과 비교해도 매우 열악하다. 그러나 정부 구조가 이렇게 나뉜 2010년 이후 지금까지 10년간 ‘요보호 아동’은 줄어들고 ‘위기 청소년’은 늘어나는 추세다. 제도와 현실이 거꾸로인 셈이다.
학대와 방임, 억압적 통제를 피해 집을 나온 청소년들에게 가장 절실하지만 가장 구하기 어려운 것은 ‘집다운 집’이다. 청소년들은 피시방, 패스트푸드점, 상가 계단 등을 전전하며 범죄 위험에 노출되고, 더는 안 되겠다 싶을 때 쉼터와 같은 시설에 간다. 그러나 27만여명으로 추산(2018년 기준)되는 가정 밖 청소년 중 쉼터 이용자는 연간 3만여명에 불과한데다 그마저 절반 이상이 시설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떠난다.
집을 나온 뒤 쉼터 4곳에 머물렀던 지우(가명)는 왜 시설이 집이 될 수 없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원해서 규칙적 삶을 사는 것과 입장하는 순간 정해진 규칙이 적용되는 시설의 삶은 정말 다르니까요. 쉼터 안에서는 하루 시간의 분배를 내 필요에 따라 계획할 수 없어요. 여가 시간이 필요 없는데 여가 시간이 있다거나, 가둬두지 않는다고 하지만 막상 쉼터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서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프로그램을 하더라도 그건 쉼터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죠. 여행객처럼 쉼터에서 쉼터로 옮길 때도 짐이 늘 단출했어요.”
현재 가정 밖 청소년들에게 주어진 주거 선택지는 원가정 복귀 또는 시설 보호다. 공공임대주택 입주 신청도 쉼터에서 2년 이상 지낸 18세 이상 청소년에게만 자격을 준다. 폭력이 여전한 집에 돌아가는 것도, 꽉 짜인 규율을 강제하는 시설 입소도 청소년들에겐 대안이 되기 어렵다. 둘 다 거부하고 거리를 선택한 청소년들이 늘어나는데, 이들은 어디에서 살아야 할까.
청소년 자립팸 ‘이상한나라’ 활동가인 한낱은 “거리 생활은 길고양이의 삶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건물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가 인기척을 피하고 눈치를 보며 다니고, 늘 긴장하고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 활성화된 과잉 각성 상태”가 길어질수록 삶이 안정되기란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안정적 거처를 갖고 스스로 일상의 질서를 만들어야 그에 근거해 자기 삶의 불확실한 변수를 다룰 수 있게 된다. 주거 위기를 겪는 가정 밖 청소년의 생활은 한낱의 표현에 따르자면 “변수만 가득한 삶”이다. 교육이나 취업 등 자립을 위한 단계를 밟아 최종적으로 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 아니라 ‘집다운 집’을 먼저 제공하는 정책이 가정 밖 청소년들에겐 특히 절실하다. 시설 말고도 이용할 수 있는 주거 형태가 다양해야 하고, 주거 위기를 겪는 청소년도 주거급여나 긴급복지제도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의 주거 위기를 설명하던 한낱은 “‘너라면 그럴 수 있겠어?’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걸 청소년에게 권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가 묻는다. 당신에겐 들어가기 무서운 집, 사생활이 없는 시설이 ‘집’이 될 수 있나요?
청소년 주거권을 위한 온라인 캠페인에선 이런 말도 보았다. 청소년에게 집다운 집이란 “도망쳐 나가는 곳이 아니라 주변의 위험과 갈등, 생각하기 싫은 것들로부터 도망쳐서 돌아올 곳.” 바로 “당신이 사는 그 집과 같은 집”이다.
작가·<이상한 정상가족>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