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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회초리와 선거

등록 2021-05-11 12:25수정 2021-05-12 10:08

[김희경의 점선의 연결]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징계권 폐지로 이제 법이 체벌을 용인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공적 언어에서 회초리 은유도 사라져야 한다. 속뜻이 뭐든 아이를 때려서 바로잡겠다는 폭력이 괜찮은 양 착각하게 만들어서 문제고, 50여년 전부터 쓰인 낡은 은유를 고수하는 건 정치 언어가 그만큼 시대에 뒤처진다는 방증이다. 이번 선거가 ‘20대의 반란’으로 불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시대착오적이다.

‘아동폭력 근절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십’이라는 국제기구가 있다. 2016년 유엔 사무총장의 제안으로 500여개 기관이 모여 만든 연대체인데, 3월 말부터 지난주까지 이 기구의 체벌 근절 캠페인 누리집 간판 소식은 우리나라 이야기였다.

대한민국이 세계 62번째 체벌 전면금지 국가가 되었다는 선포였다. 63년간 유지돼온 부모의 자녀 징계권이 지난 1월 민법 개정으로 삭제되면서 달성한 지위다. 2015년 아동복지법에 ‘아동에게 신체적 고통이나 폭언 등의 정신적 고통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신설됐으나 체벌을 용인하는 징계권이 민법에 남아 있었는데, 그게 없어진 거다. 비록 제재조항은 없지만, 징계권 폐지는 과거와 달리 부모도 아이를 때리면 안 된다는 것이 이제 우리 사회의 규칙이라는 선언이다.

이 기구는 이번 법 개정이 “다른 나라에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상찬했는데, 읽으면서 괜히 혼자 머쓱해졌다. 국내에선 일부 매체에 보도됐을 뿐 너무 잠잠하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아니나 다를까.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지난달 실시한 조사에서 부모의 67%, 아동의 80%가 징계권 삭제로 부모의 자녀 체벌이 금지된 사실을 모른다고 응답했다. 오래된 관행을 바꾸려면 법 개정에 뒤따르는 새로운 절차의 정착과 인식 개선 노력이 더 중요한데, 이를 위한 정부의 노력도 미흡하다.

지난주 어린이날은 징계권이 폐지된 지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4·7 보궐선거 이후 공적 언어에서 체벌의 은유가 쏟아져 나오던 시기이기도 했다.

선거 직후 “회초리를 들어주신 시민들의 마음을 모두 받겠다”고 한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의 말에서부터 “매서운 회초리를 내려주셨던 민심을 잘 수용”(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신임대표)하겠다는 말에 이르기까지 여당이 참패한 선거 결과를 회초리로 표현한 은유가 잇따랐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회초리를 “때릴 때 쓰는 가는 나뭇가지. 어린아이를 벌줄 때나 마소를 부릴 때 쓴다”고 풀이한다. 부모나 교사가 자녀, 학생을 체벌할 때 쓰던 도구로 보통 성인 사이에선 쓰이지 않는 단어다. 여야는 모두 이 낱말을 선거 결과 해설 용어로 사용했다.

여당은 주로 전통적인 ‘사랑의 매’라는 뜻으로 썼다. “국민의 회초리는 사랑”(정세균 전 총리)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윤호중 원내대표는 “국민들께서 저희에게 아주 매서운 회초리”를 들었으니까 “왜 우리를 이렇게 바로 세우려고 가르침을 주셨는지 제대로 파악”하겠다고 말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도 회초리라는 표현을 쓰며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이 잘되라고 심하게 질책하고 훈계하는 것과 같은 것 아니겠는가”라고 해석했다.

반면 야당의 용법은 심판, 결별과 결부한 징벌의 뜻이 강하다. 주호영 국민의힘 전 원내대표는 “국민이 심판의 회초리를 든 것”이라고 말했고, 김기현 원내대표는 “정부·여당에 더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결별 선언”으로 “국민은 엄중한 회초리를 든 것”이라고 썼다.

옛날 신문을 검색해보니 선거철의 회초리 은유는 오래된 관행이다. 투표를 회초리로 묘사한 기사는 1967년 5월 대통령선거 무렵부터 등장했다.

전쟁, 경주, 권투 용어 등 선거를 묘사하는 흔한 은유 이외에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회초리가 유권자의 선택을 묘사하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으로 쓰이게 됐을까. 최초의 사용자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설명에 기대어 짐작해볼 수 있을 듯하다.

그는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라는 책에서 “정치적 도덕은 가정의 도덕”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맨 처음 듣는 경험을 가정에서 한다. 우리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지배할’ 수밖에 없는 맨 처음의 도덕적 권위자는 부모다. 사람들은 더 거대한 사회집단 내의 통치를 사유하는 틀로 자동으로 가정을 떠올리며, 무엇이 이상적인 가정이고 자녀는 어떻게 양육하는 게 옳은지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정치에 투영한다는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투표를 통한 유권자의 의지 표출을 회초리라 부르는 오랜 관행은 부모의 회초리를 엄한 사랑으로 미화하면서 체벌에 수용적이었던 우리 문화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패배한 정치인은 부모가 회초리를 들도록 만든 스스로의 잘못을 참회하며 달라지겠노라 다짐하는 자식의 겸허한 지위를 자처하고, 승리한 정치인은 ‘맞을 짓’을 했다고 비난해온 상대에게 부모가 회초리를 든 것에 기뻐하면서도 까딱하다간 자신도 맞을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는 또 다른 자식처럼 행동거지를 단속한다.

그러나 은유가 아닌 현실의 회초리는 가르침도, 엄한 사랑도 아니고 그저 명백한 아동폭력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뉴스분석시스템인 ‘빅카인즈’에서 4·7 보궐선거 이후 5월6일까지 한달간 회초리라는 단어가 포함된 뉴스는 모두 602건이었다. 그중 정치사회적 은유를 제외하고 실제 회초리를 지칭한 뉴스는 45건이었는데 모두 하동 서당 폭력사태,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회초리로 체벌해 실형을 선고받은 목사 부부 사건 등 아동폭력에 관한 것이었다.

공적 언어가 일상에 끼치는 영향은 크다. 레이코프는 “공적 정치 토론에서 어떤 은유를 반복해 사용하면 이 은유는 해당 쟁점을 지각하는 주요 방식이 되고, 그냥 상식의 일부가 되어버린다”고 지적했다.

징계권 폐지로 이제 법이 체벌을 용인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공적 언어에서 회초리 은유도 사라져야 한다. 속뜻이 뭐든 아이를 때려서 바로잡겠다는 폭력이 괜찮은 양 착각하게 만들어서 문제고, 50여년 전부터 쓰인 낡은 은유를 고수하는 건 정치 언어가 그만큼 시대에 뒤처진다는 방증이다. 이번 선거가 ‘20대의 반란’으로 불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시대착오적이다. 유권자로서 내 선택이 그렇게 불리는 것도 마뜩잖다. 회초리를 언급한 정치인 중엔 징계권 삭제 법안을 발의한 의원도 있던데, 회초리를 버리고 체벌 금지를 널리 알릴 후속 작업을 고민해주면 좋겠다.

최근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탄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에서 멋지게 회초리를 우습게 만들어버렸다. 할머니를 골탕 먹인 아들을 혼내면서 아버지가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하자 아이는 하늘하늘한 강아지풀을 들고 와서 아버지에게 내민다. 가부장인 사위의 눈치를 보며 손자에게 ‘장난치면 못 써, 빨리 아버지한테 잘못했다고 빌어’ 같은 투로 나무랄 만도 하건만, ‘할머니 같지 않은 할머니’는 아이에게 “네가 이겼다!” 선언하며 상황을 경쾌하게 마무리한다.

인터뷰를 보니 이 대목은 감독의 요청으로 윤여정이 생각해낸 대사였다고 한다. 동시대와 호흡하는 감각이 생생한 배우였기에 가능했을 유쾌한 장면이었다.

작가·<이상한 정상가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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