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전쟁’이 에스케이(SK)가 엘지(LG)에 2조원의 보상금을 주는 조건으로 일단락됐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지난해 2월 영업비밀 침해 예비결정과 올해 2월 정식 판결에서 엘지의 손을 잇달아 들어준 데는 미국의 증거개시(디스커버리) 제도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한국 언론이나 경제계는 그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디스커버리는 소송 당사자들이 증거자료를 교환하는 미국 특유의 소송 절차로, 공정한 재판을 위한 필수적 장치로 인식된다. 소송 당사자들은 증거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유지해야 할 ‘증거보존’ 의무가 있다. 만약 이를 어기면 법원의 엄격한 제재를 받는다. 심한 경우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것으로 간주한다.
국제무역위 판결문에는 에스케이의 증거인멸 사례가 여럿 나온다. 엘지와 직원 부당 스카우트 소송이 진행 중이던 2018년에는
엘지에서 취득한 자료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고, 이런 지시를 담은 이메일도 삭제하도록 했다. 엘지에서 온 직원의 컴퓨터 휴지통에서는 엘지 관련 삭제 대상인 980개 파일 리스트가 담긴 엑셀 시트가 발견됐다. 작성 시점은 엘지가 국제무역위에 제소한 2019년 4월이다.
국제무역위는 에스케이의 증거보전 의무 불이행을 강도 높게 지적했다. “에스케이의 증거인멸, 증거개시 과정에서의 늑장 대응 (중략) 등은 이 사건을 신속히 끝내야 하는 국제무역위의 법적 의무와 절차적 일정을 노골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에스케이이노베이션 이사회도 “글로벌 분쟁 경험 부족 등으로 미국 사법 절차에 미흡하게 대처했다”고 인정했다. 한 임원은 “증거인멸 이슈 때문에 영업비밀 침해라는 본질적 사안은 제대로 검증도 못 한 채 소송에서 패했다”고 아쉬워했다.
공정거래법은 올해 말부터 ‘자료제출 명령제’를 새로 도입한다. 담합 등과 관련한 손해배상 소송 때 법원은 피해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손해액 입증에 필요한 자료를 제출하도록 법 위반 기업에 요구할 수 있다. 만약 불응하면 피해자의 주장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디스커버리 제도와 유사하다. 앞으로 다른 법으로도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국내 기업들은 증거인멸이나 조사방해에 둔감했다. 이런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큰 비용을 치러야 하는 시대가 다가왔다.
곽정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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