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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도시에서 나무로 살아간다는 것은 / 성연철

등록 2021-05-02 13:37수정 2021-05-03 02:09

성연철 | 전국팀장

어떤 것은 살아남았고, 어떤 것은 사라진 뒤에야 존재가 드러났다.

서울 덕수궁 돌담길을 지키던 플라타너스 20여그루는 간신히 톱질을 피했다. 뿌리가 ‘담장에 금을 가게 한다’는 이유를 들어 베려던 시의 계획을 시민들이 막아섰다. 나무는 50여년 동안 서울 한가운데서 1987년 6월항쟁의 벅참을, 2002년 월드컵의 붉은 환희를,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노제의 노란 슬픔을, 2016~2017년 촛불의 물결을 내려다봤다.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이라 노래하던 시인의 마음과 시민의 마음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90년가량 대전시 옛 충남도청 건물의 담장 구실을 하던 향나무는 잘려나갔다. 2006년 일부가 불탄 뒤 전국에서 비슷한 나무를 구해 복구할 만큼 시민의 애정을 받았지만, 금세 172그루가 사라졌다. 잘려나간 건 나무가 아니라 백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도시에서 나무로 산다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 사람보다 너끈히 오래 살 것 같지만, 변덕스러운 인간의 마음은 ‘수명’(命) 혹은 ‘목(木)숨’을 쉬 허락하지 않는다. 21년 전, 청와대 들머리인 서울 경복궁 돌담길에서는 44그루의 아름드리 가죽나무가 잘려나갔다. 많게는 수령 70~80년에, 높이가 20m, 둘레 2~3m였던 고목의 ‘증발’은 시민의 마음을 허하게 했다.

2009년에는 세종대로의 터줏대감 구실을 하던 은행나무 29그루가 자취를 감췄다. 광화문광장 공사 탓이었다. 겨울이면 알전구를 두르고 연말연시를 느끼게 해주던 나무들이었다. 이들은 정부서울청사와 옛 의정부 터로 절반씩 나눠 이식됐다. 10년여가 지났지만, 어떤 나무들은 여태 적응하기 힘든 듯 여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긴 이파리를 지상에 떨군다.

제법 알려진 나무들이 이럴진대 뭇나무들의 시련은 더하다. 해마다 무자비한 가지치기를 견뎌야 한다. 잔가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 ‘바리캉식’ 가지치기는 광합성에 최적화된 몸을 만들어온 나무의 진화와 경영 전략을 간단히 뭉개버린다. 나무는 아래쪽 잎은 크게, 위쪽 잎은 작게 만들어 최대한 고루 햇빛을 받으려 한다.

재개발·재건축의 위협도 마주해야 한다. 한국에 사는 메타세쿼이아는 아파트의 재개발·재건축 기한이 곧 수명이다. 수백, 수천 년을 살아 미국의 한 국립공원에서는 ‘셔먼 장군’이라고 불린다는 나무다. 차가운 돈의 합리성을 사람들뿐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나무들도 고스란히 함께 겪는 셈이다.

그러나 나무의 존재감은 작지 않다. 때론 인간이 만든 건축물을 훌쩍 뛰어넘어 한 도시의 인상을 좌우하기도 한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를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자카란다는 몽환적인 색과 향기로 이 도시를 규정해버린다.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도열한 플라타너스 역시 방사형으로 뻗은 이 도시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다. 중국 베이징대 앞 도로를 초록 터널로 덮어버리는 회화나무도 마찬가지다. 기품있게 가지를 드리운 모양 덕에 선비나무 혹은 학자수, 영어로도 스칼러 트리(Scholar tree)로 불리는 이 나무는 대학과 무척 어울린다.

<랩걸>을 쓴 생물학자 호프 자런은 “식물은 우리처럼 공간을 이동하면서 여행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사건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견디면서 시간을 통한 여행을 한다”고 했다.

우리 도시가 인내심을 지니고 나무와 마주했으면 싶다. 이 봄 서울에서, 부산에서, 여러 도시의 길가에서 숨 막히는 보도블록 아래 지하철과 지하상가와 지하주차장, 얽히고설킨 상하수도관과 각종 케이블을 뚫고 피해 필사적인 뿌리내리기를 하고 있을 플라타너스와 느티나무, 이팝나무, 팽나무, 은행나무를 응원한다. 이 가로수들이 대구 동대구로의 히말라야시다나 광주 푸른 길의 느티나무처럼 오래오래 우리와 함께 시간여행을 하길 기대한다. 

(*제목은 탁기형 작가의 에스엔에스에서 따옴)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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