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우 | 서울과학기술대 강사(과학기술학)
백신 개발처럼 한시가 급한 연구가 주목받고 최초 발견의 영광을 놓치지 않으려고 경쟁하는 연구가 중요한 요즘 세상이지만, 더러는 자연의 긴 시간을 기다리며 여러 세대가 함께하는 느린 연구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대학 물리학과에서는 1927년 시작한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고열로 녹인 타르 찌꺼기를 깔때기에 부어 굳힌 다음에 6~12년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고체 타르의 흐르는 성질을 관찰한다. 90여년 동안 이곳 연구자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며 아홉번의 방울이 맺히고 떨어지는 현상을 관찰했다. 2014년 <비비시>를 비롯해 여러 언론이 주목하는 가운데 아홉번째 방울이 떨어졌고, 이제 열번째 방울이 맺혀 낙하를 준비한다.
최근 이곳 웹사이트에 들러보니 열번째 방울을 보여주는
스트리밍 방송(smp.uq.edu.au/pitch-drop-experiment)이 진행 중인데, 미동도 느껴지지 않는 느린 자연현상을 관찰하겠다고 등록한 이들이 160개국 3만명이라 한다.
또 다른 느린 실험 하나가 최근 <뉴욕 타임스>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미국 미시간주립대학 식물학자들이 140년 넘게 이어온 씨앗 발아 실험이다. 1879년 윌리엄 제임스 빌 교수가 씨앗이 흙 속에서 얼마나 오래 휴면하는지를 알아보고자 이 실험을 구상했다. 주변 농민들도 궁금해하던 물음이었다고 한다. 흑겨자, 강아지풀 같은 21종의 씨앗 50개씩을 흙모래와 함께 담은 병 20개를 만들어 남들 모르게 캠퍼스 한쪽에 묻어두었다. 이후 5년에 한 병씩 꺼내 씨앗이 싹을 틔우는지 관찰했다.
세월이 흘러 실험은 후세대 연구자들이 이어받아 계속된다. 병을 묻은 곳을 표시한 비밀지도는 후세대에 계속 건네졌다. 그동안 실험 주기는 5년에서 10년, 20년으로 수정됐다. 2000년에 꺼낸 14번째 병에 이어, 코로나19 탓에 미뤄진 15번째 병이 지난달 햇빛을 피해 캄캄한 새벽에 꺼내졌다. 실험은 21년 만에 다시 시작돼 분주해졌다. 이제 4개의 병, 80년의 실험이 남았다.
세대를 거치며 실험도 다양해졌다. 디엔에이(DNA)를 모르던 19세기에 실험은 ‘씨앗이 얼마나 오래 때를 기다리며 살아 있는가’라는 단순한 물음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분자생물학 덕분에 훨씬 흥미로운 물음을 다룬다. 평범한 씨앗은 자연 상태에서 한 세기 넘게 전해져 귀한 보물이 됐다.
앞세대가 심은 나무를 연구하고 또 뒷세대의 연구를 위해 나무를 심는 삼림과학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자연의 시간과 함께 느리게 연구하는 이들에게 협업하는 동료는 동시대뿐 아니라 통시대 과학자들이다. 지식과 문화는 사물과 실행의 공유를 통해 세대를 넘어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