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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모병제는 진보’ 도그마 경계해야 / 권혁철

등록 2021-05-04 19:14수정 2021-05-05 02:40

지난 4월27일 청년정의당 강민진 대표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의당 당대표실에서 열린 '모병제 도입 및 군인 처우 개선을 위한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평화네트워크 정욱식 대표, 모병제추진시민연대 이유진 대표, 정의당 여영국 대표, 청년정의당 강민진 대표. 국회사진기자단
지난 4월27일 청년정의당 강민진 대표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의당 당대표실에서 열린 '모병제 도입 및 군인 처우 개선을 위한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평화네트워크 정욱식 대표, 모병제추진시민연대 이유진 대표, 정의당 여영국 대표, 청년정의당 강민진 대표. 국회사진기자단

권혁철 ㅣ 논설위원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12월1일 미국 젊은이들은 대학 기숙사, 친구 집에 모여 텔레비전 생방송을 지켜봤다. 당시 징병제였던 미국은 이날 베트남에 갈 군인을 처음으로 ‘무작위 복권 추첨(Draft lottery)’ 방식으로 뽑았다. 19~26살인 미국 남성을 대상으로 징집 순서를 추첨으로 정한 것이다. 생일에 해당하는 1년 366일(2월29일 포함)에 임의의 번호를 부여한 종이가 파란색 플라스틱 캡슐에 들어 있었다. 처음 뽑힌 캡슐의 번호는 258번(9월14일)이었다. 이날이 생일인 모든 징병 등록자에게는 추첨번호 1번이 배정됐다. 입대할 195개의 추첨번호 순서가 정해졌다. 생년월일이 같은 징병연령(1944년 1월1일~1950년 12월31일 출생)의 남성들이 한꺼번에 소집돼 복무했다.

1946년 6월14일생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도 징집 대상이었다. 군복무를 하지 않은 트럼프는 추첨번호 366번 가운데 자신이 356번으로 뒤쪽 번호를 받아 베트남 참전 기회가 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와 달리 미국에서는 ‘뒤꿈치 뼈에 이상이 있다’는 가짜 진단서로 트럼프가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의혹도 나왔다.

미국은 왜 추첨으로 군대 갈 사람을 뽑았을까. 당시 미국이 징병제였지만 입대 가능한 남성 인구가 현역병 징병 규모보다 휠씬 많았다.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징병 기준은 ‘연장자 우선’이었다. 나이가 많을수록 병역 면제나 기피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이 든 병사들이 많아지면서 일선 부대 전투력이 떨어지고 20대 초반 젊은이들은 입대가 늦어져 병역 불확실성이 커졌다. ‘징병이 공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왔고, 1969년 무작위 추첨 방식이 등장하게 됐다. 미국은 베트남전 이후 1973년 모병제로 전환했다. 우리에게는 무척 낯선 무작위 추첨 방식은 미국뿐만 아니라 군대 갈 인구가 징집 인원보다 많은 징병제 국가들이 모병제로 전환할 때 주로 채택한 방법이다. 미국 사례에서 보듯 병역제도는 나라마다 다르고 한 나라에서도 그때그때 다르다.(미국 병역제도는 김신숙 저 <한국의 병역제도>를 인용했다.)

요즘 징병제냐 모병제냐를 두고 논란이다. 대체로 진보개혁 쪽에서는 모병제 전환에 찬성하고 보수 쪽에서는 징병제 유지를 주장한다. 나는 모병제가 우리 현실에 맞는 진보적 대안인지 따져볼 대목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병제는 병역의 시장화 정책이다. 진보개혁 쪽이 물, 전기, 가스, 철도, 의료, 교육 등 다른 공공서비스의 시장화에는 강하게 반대하면서 대표적 공공재인 병역(military service)의 시장화에는 찬성하는 이유를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나는 분단 현실에서 징병제가 한반도 평화의 안전판 구실을 하고 있다고 본다. 한반도 정세가 극도로 악화되면, 국민들 사이에서는 ‘전쟁만은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이 공감대의 바탕에는 젊은 남성들이 싫든 좋든 군대에 가야 하는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1994년 여름 1차 북핵 위기 때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석달 내 국군 사상자를 49만명으로 시뮬레이션했다. 내년 국군 병력이 50만명이니, 유사시 군복을 입고 있으면 무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재벌 아들, 장관 아들, 국회의원 아들, 골목 가게 주인 아들, 비정규직 노동자 아들 구분 없이 모두 죽거나 다치게 된다. 공멸 위험이 역설적으로 대북 군사 강경책 발동을 억제한다.

2006년 찰스 랭걸 미국 민주당 하원의원은 “징병제로 미국 관료와 정치인 자식이 군대에 있었더라면 정부가 빈약한 정보로 이라크를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 때 대학생 징집에 항의하는 반전운동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불붙었다. 이와 견주면 이라크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 때는 미국 내 반전운동이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미국 안에서는 이를 징병제와 모병제의 차이로 설명하기도 한다.

나는 한반도 평화가 자리잡기 전까지 군복무에 따른 위험이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위험을 피할 수 없다면 다 같이 겪어야 공동체가 덜 위험해진다. 진보개혁 쪽이 모병제를 대안으로 검토하되 도그마에 빠질 필요는 없다.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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