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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반보는 나갔지만, 한보는 못 간 이재용 / 곽정수

등록 2021-05-06 15:25수정 2021-05-07 02:37

곽정수ㅣ논설위원

“삼성은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중략) 하지만 그 과정에서 때로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실망을 안겨드렸습니다.” 지난해 5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대국민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로부터 1년. 고 이건희 회장의 상속재산 처리 방안이 발표됐다. 여론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12조원의 상속세 납부는 많은 재벌이 사전 상속·증여로 세금 없는 대물림을 하는 현실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1조원 기부는 2008년 삼성 특검 때 이 회장이 차명재산을 사회환원하겠다고 한 약속을 13년 만에 이행한 것이다. 2만점이 넘는 미술품 기증도 좋은 선례를 남겼다.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 일가의 불법·편법 상속과 경영권 승계라는 오랜 논란을 불식하지는 못했다. 경실련은 “차명재산 사회헌납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6조원 정도의 기부가 필요했다”면서 1조원 기부를 평가절하했다. 특검이 밝혀낸 차명재산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은 삼성전자 주식 263만주다. 사건 당시에는 가치가 1조4천억원이었지만, 금융감독원이 관련 내용을 국회에 보고한 2018년에는 6조원에 달했다. 현재 가치는 10조원도 넘는다.

이건희 회장이 남긴 삼성생명 주식도 논란거리다. 이 회장은 부친인 이병철 회장이 작고한 지 10년 뒤인 1998년 삼성 임원들로부터 생명 주식 299만주를 주당 9천원의 싼값에 매입했다. 경제개혁연대는 “해당 주식은 임직원 명의의 차명주식으로, 상속세를 제대로 안 냈다”고 지적했다. 주식의 현재 가치는 2조5천억원에 달한다.

이 부회장 자신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보유한 삼성물산·전자·에스디에스 주식은 20여년 전 전환사채(CB) 등을 이용해 헐값으로 확보한 것이다. 지난 1월에는 경영권 승계를 위해 국정농단세력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2년6개월의 실형 선고를 받았다. 앞으로 삼성물산-제일모직 불법 합병 사건의 재판도 받아야 한다.

“그동안 승계 문제와 관련해 많은 질책을 받았습니다. (중략) 경영권 승계 문제로 더는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회장은 대국민 사과에서 경영권 승계 논란을 불식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 부회장이 이번에 보다 통 큰 사회환원으로 그 진정성을 확실히 보여주고, 상속재산과 사회환원을 둘러싼 논란의 소지도 없앴다면 어땠을까? 불법·편법 상속과 경영권 승계 논란을 완전히 종식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과거와는 확실히 선을 긋는 전기가 마련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기대했던 ‘최대’가 아니라 ‘최소’를 선택했다.

“저는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 부회장은 대국민 사과에서 4세 경영승계 포기도 선언했다. 경영세습은 한국 재벌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재계 1위 삼성의 변화는 전체 한국 재벌에 역사적 전환점이 될 수밖에 없다. 경영 능력도 없으면서 금수저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총수 자리에 오르는 일이 불가능한 날도 머지 않았다.

경영세습을 포기한다면 그에 맞는 새로운 소유지배구조 구축이 과제다. 셀트리온의 서정진 명예회장은 지난 3월 ‘65살 정년 퇴임’과 ‘소유-경영 분리’를 단행했다. 그는 6년 전 직원들에게 이를 약속한 뒤 차근차근 준비를 했다. 이 부회장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상속재산 처리에 그 실마리가 보일 수도 있다고 기대했으나, 찾지 못했다. 이 부회장이 50대로 아직 젊고, 재판을 받느라 정신도 없었겠지만 솔직히 아쉽다.

이 부회장이 보다 확실히 과거와의 단절 의지를 보여줬다면 우리 사회의 해묵은 과제들을 풀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됐을 것이다. 상속세가 대표적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율이 탈법을 조장한다”는 재계 주장과 “세금 없는 대물림 단절이 먼저”라는 반론이 평행선을 달린 지 오래됐다. 이 부회장의 결단을 있었다면 세금도 제대로 내고, 상속세도 선진국 수준으로 손질하는 사회적 타협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 부회장은 삼성은 물론 한국사회가 과거의 잘못된 관행과 단절하고 새 출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지만, ‘용의 눈동자’를 그려 넣는 데는 실패했다. 오히려 국민적 공감대 없이 제기된 ‘사면론’과 ‘상속세 과잉론’으로 사회 갈등이 재연됐다. 이 부회장이 ‘반걸음’은 앞으로 나갔지만, ‘한걸음’은 못간 게 아쉽다.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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