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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만국의 벼락거지여, 단결하라

등록 2021-05-11 17:20수정 2021-05-12 02:38

로이터 연합뉴스
로이터 연합뉴스

[아침 햇발] 안영춘  논설위원

‘벼락거지’라는 신조어를 처음 접했을 때의 기분을 한 단어로 축약하는 일은 지금도 난감하다. 유쾌함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고, 부풀려 말하면 양잿물 같은 액체가 얼굴에 훅 끼얹힌 느낌에 가까웠다. 부동산도, 주식도, 암호화폐도 없는 나를 멸칭하는 거라 여겨져서만은 아니었다. 자기비하의 포즈를 취하려고 하필 길에서 힘겹게 연명하는 약자를 비유의 도구로 삼은 것부터 걸렸다. 적어도 같은 계열 신조어의 선배격인 ‘흙수저’는 자신의 처지를 사물에 빗댈 뿐, 더 열악한 동료 시민의 비참을 끌어와 전시하지는 않았다. 무의식적이어서 되레 공공연하게 배제와 차별을 표상했는지 모른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뿐더러, 더 심대한 징후적 문제를 품고 있기도 하다.

벼락거지는 범주를 지우는 진공청소기다. 벼락부자 아니면 모두 벼락거지다. 세습 부자와 신흥 4차산업 자본가 정도만 예외다. 부자와 거지 사이에 제3의 범주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 양극성의 담론에도 리얼리티는 있을 터이다. 상징은 본디 현실을 이분법으로 단순화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하지만 정작 벼락거지의 인식론이 빼닮은 건 공상과학(SF)의 문법이다. 영화 <엘리시움>(2013)에서는 버려진 99%의 인류와 선택받은 1%의 인류가 지구(지옥)와 엘리시움(천국)으로 단절된 채 살아간다. 사이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벼락거지’와 <엘리시움>의 서사적 차이라면, 전자는 특권으로의 편입을 욕망하는 반면 후자는 특권 구조의 해체를 추구하는 데 있다.

그러나 벼락거지라는 표현에 공상적인 선망만 담겨 있다면 이토록 곤혹스럽지는 않을 듯하다. <엘리시움>이 현재의 부조리를 먼 미래의 시간으로 증류한 유토피아적 예언이라면 벼락거지는 현재의 모순을 당대의 스크린에 투영한 디스토피아적 그림자다. 그림자는 광원과의 거리와 각도만큼 부풀거나 늘어나 있으나, 동시대의 무대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다. 벼락거지의 리얼리티는 계보학으로도 입증된다.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이후 등장한 ‘부자 되세요’의 속물주의 덕담은 출생 배경을 극복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흙수저’의 자조를 거쳐 까마득히 멀어지는 자산격차의 꽁무니를 하릴없이 응시하다 벼락거지로 몰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실을 가장 뼈저리게 절감하는 세대는 아마도 ‘엠제트(MZ) 세대’일 것이다. 세대론자들의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들은 단군 이래 최초로 앞세대보다 가난해지는 세대, 어려서부터 경쟁과 공정의 원리를 체화한 세대인데, 불행하게도 부동산과 주식, 암호화폐 말고는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없다 보니 ‘영끌’이니 ‘빚투’니 하는 모험을 주저 없이 감행하는 게 공정성을 구현하기 위한 주요한 실천이라고 인식하게 됐다. 적어도 벼락거지-영끌-빚투의 신조어 계열체가 엠제트 세대에 의해 발명된 거라면(확인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공통된 세대적 특성이 실재할 가능성을 유력하게 뒷받침한다. 하지만 그 정체성이 세대 내부의 차이보다 큰지는 따져볼 일이다.

영끌과 빚투는 지옥(지구)에서 풀려나 천국(엘리시움)으로 가려고 보석금을 내는 행위다. 알다시피 감방 동기라고 해서 계급이 같지는 않다. 두 전직 대통령과 재벌 총수도 있으나, 몇푼 벌금을 못 내 형을 사는 노역수가 부지기수다. 벼락거지라는 상대적 신분은 어떻게든 보석금을 마련해볼 꿈이라도 꾸지만, 이들 절대적 신분(그냥 거지)에게는 언감생심이다. 영끌, 빚투는 그 자체로 자원이다. 이 자원을 확보한 이들은 엠제트 세대를 과잉대표한다. 대기업의 젊은 사무직이 전형적이다. 자본가보다 생산직 노조와 투쟁을 더 적대하는 듯 보이는 저들이 공정성이라는 이름의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노조를 만들 때, 또래의 파견 노동자는 평택항에서 산재로 비명횡사했다.

벼락거지의 작명에 차별과 배제의 기제가 들어 있는 것을 우연으로만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작명은 선망과 더불어 자기비하의 우울도 동반하기 마련이다. 엠제트 세대의 자살률이 최근 가장 가파른 상승세를 기록하는 여러 배경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을 속절없이 몰락시키는 압도적 지대 추구 경제의 참담한 이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만국의 벼락거지들이여, 엘리시움을 선망 말고 해체를 위해 단결하라!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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