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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나라와 군대가 배식에 실패하면 / 손원제

등록 2021-05-20 16:36수정 2021-05-26 18:53

군부대에서 부실 급식 논란이 잇따르는 가운데 강원 홍천의 육군 11사단에서도 관련 폭로가 나와 군 당국이 조사에 나섰다. 19일 페이스북 페이지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에는 11사단 예하 부대 장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이날 점심 배식 메뉴가 부실했다고 폭로했다. 페이스북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 캡처/연합뉴스
군부대에서 부실 급식 논란이 잇따르는 가운데 강원 홍천의 육군 11사단에서도 관련 폭로가 나와 군 당국이 조사에 나섰다. 19일 페이스북 페이지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에는 11사단 예하 부대 장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이날 점심 배식 메뉴가 부실했다고 폭로했다. 페이스북 '육군훈련소 대신 전해드립니다' 캡처/연합뉴스
손원제 논설위원
손원제 논설위원
급식세대가 아닌 내가 처음으로 말 그대로 ‘나랏밥’을 먹어본 건 대학 1학년 겨울방학쯤이었다.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서울 사직공원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가 어떤 이유에선가 경찰서로 연행됐고 1박2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때 식사로 내준 게 금색 양은 도시락에 담긴 ‘관식’이었다. 보리가 반 넘어 섞인 밥에 단무지와 장아찌가 몇 점 들어 있었다. 당시 관식 단가가 이백몇십원이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부실했다. 대학 학생식당의 가장 싼 장국밥이 400원쯤 했다. 뭔가 중간에서 새 나가지 않고서야 저렇게 나올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의아했던 기억이 있다.

1990년대 초반 군에 입대하고 본격적으로 나랏밥을 타 먹었다. 생각보다 좋았다. 매일 빠짐없이 고기나 해물 반찬이 올라왔다. 식판 가득 담아 훈련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장국밥만 사 먹던 학생 때보다 체중이 늘어서 태어나 처음으로 60㎏을 넘겼다.

대대 행정병을 하다가 3~4주쯤 취사병(조리병)을 했다. 산처럼 쌓인 동태를 토막 내고 내장을 긁어내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닭다리를 골라뒀다가 건빵과 같이 튀겨 먹는 등 취사병의 소소한 특권을 함께 누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소확횡’(작지만 확실한 횡령)이다. 가끔 취사반장이 간부 누구가 고기를 덩어리째 챙겨 갔다며 투덜거렸다. ‘중확횡’이라 할 수 있겠다. 더 윗선의 ‘대확횡’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배를 곯지는 않았다. 한국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향해 나아가던 때였다.

제대 뒤 첫 예비군 훈련에서 군대밥에 대한 좋은 인상이 싹 가셨다. 교통비로 몇천원 주고 점심은 도시락을 사 먹게 했다. 교통비보다 비쌌던 도시락은 몇해 전 유치장 관식보다 크게 나아 보이지 않았다. ‘이게 저 값이면 똥파리도 새다’,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중·대확횡’ 의혹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현역 장병의 식단은 다르겠거니 했다. 기자 초년생이던 1997년 외환위기 직후 휴가 나온 후배들에게 배식량이 줄었다는 말을 들었다. 추가 취재를 거쳐 ‘병사들의 식단이 초라해졌다’는 기사를 썼다. 그러나 경제위기를 넘긴 뒤로는 다시 나아졌으려니 했다.

착각이었나 보다. 빈약한 군대 식단에 대한 폭로가 쏟아지고 있다. 휴가 복귀 뒤 코로나 예방을 위해 격리된 51사단 병사에게 지급된 식사는 김치와 오이무침 한 점, 닭볶음 ‘한 조각 반’이 전부였다. 인터넷에 올라온 이 사진 밑으로 줄줄이 반찬 가짓수가 더 적은 다른 부대의 식단 사진들이 달렸다. “그 정도면 감사히 먹자.” “잘 나오네. 저 정도면.” 댓글에는 체념과 좌절감이 묻어난다. “그지(거지) 같은 군대”라는 한마디엔 먹는 걸로 장난치지 말라는 뾰족한 질타가 담겼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넘긴 세계 10위 경제강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부랴부랴 국방부가 대책을 내놨지만, 파문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19일엔 11사단 병사의 폭로가 나왔다. “고등어 두 조각 받았다가 ‘한 조각이 정량’이라고 해서 한 조각은 다시 빼앗겼다”며 “살면서 못 먹어서 서러워본 적 있느냐”고 했다. 이 병사는 격리되지 않은 정상근무 인원이다. 총체적 난국이다. 격리 병사는 애초 식단엔 문제가 없어도 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잘못됐을 수 있다고 변명할 여지라도 있지만, 이 경우는 아니다.

장병 한끼 급식비는 2930원, 고등학생(3625원)의 80% 수준이다. 그러나 군에선 조리에 인건비가 거의 들지 않고 훨씬 대량의 식재료 구매가 가능하다. 실제 식단의 질과 양이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일인지 의문이다.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많은 것”은 아닌지 샅샅이 살펴야 하는 이유다. 물론 단가도 신속히 현실화해야 한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는 군사 격언이 있다. 병사들은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배식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로 비틀어 웃음 소재로 쓴다. 그러나 이 말은 농담을 넘어 ‘군인은 먹어야 싸울 수 있다’는 근원적 사실성과 ‘서럽지 않게 먹여는 줄 것’이라는 국가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시대를 거스른 ‘배식 실패’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한다.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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