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가 지난 2일 국회 당대표회의실에서 열린 '민주당 국민소통·민심경청 결과보고회'에서 조국 전 장관 문제 등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곽정수 ㅣ 논설위원
4년 전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직후 한국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개정을 압박했다. 미국에 불리하다는 이유였다. “거부하면 협정을 폐기할 수 있다”는 으름장까지 놓았다. 애초 한-미 FTA에 부정적이었던 진보진영으로서는 트럼프의 손을 빌어 협정을 폐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의외로 조용했다. 15년 전 일들을 기억하는 국민은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협정 추진을 선언하자 진보진영은 일제히 성토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값싼 미국산 농산물이 대량으로 수입되면 국내 농업 기반이 무너질 수 있었다. ‘투자자-국가 간 소송제도’(ISD)는 사법주권을 침해할 소지가 컸다. 하지만 ‘신을사조약’에 빗대고, 미국의 경제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지나쳤다.
트럼프가 협정 폐기를 들먹거리는데도 진보진영이 조용했던 것이 함축하는 바는 분명하다. 한국에 부분적으로 해를 끼친 측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득이 컸던 것이다. 그런 경우 문제점은 보완하되, 일은 추진하는 게 순리다. 비판이 지나쳐 일 자체를 반대하는 것처럼 비치면 공감을 얻기 어렵다.
진보진영은 노태우 정부가 인천신공항과 경부고속철도를 건설할 때도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했다. 환경파괴, 안전사고, 문화재 훼손이 이유였다. 한계를 맞은 김포공항과 경부선·경부고속도로 문제는 뒷전이었다. 만약 신공항과 고속철도가 없다면 어떨까? 그런 대한민국을 하루라도 상상할 수 있을까?
한-미 FTA, 신공항, 고속철도는 모두 한국 사회·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 역사적인 일들이다. 진보진영이 이들 사안에 모두 부정적 태도를 취한 것은 놀랍기까지 하다. 진보진영이 너무 늦기 전에 솔직하게 입장을 밝히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최근 문재인 정부 4년의 경제정책을 비판한 개혁진보 성향 소장파 학자를 인터뷰하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최저임금 인상, 부동산 정책이 ‘시장 수용성’을 무시하다가 실패했다는 지적에 공감하면서도, 학자들은 지난 4년간 뭐 했냐는 질문을 했다. 순간 이 질문은 학자뿐만 아니라 진보진영 모두에게 던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머리를 내리쳤다.
2018년 5월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부산에서 기자들에게 “최저임금 인상의 고용·경제에 대한 영향을 충분히 고려해 목표 연도를 신축적으로 생각하면 좋겠다”며 속도조절론을 폈다. 진보진영은 ‘임기 내 최저임금 1만원’이라는 대선 공약을 포기하는 것이냐며 반발했다. 진보진영이 최저임금 인상의 충격을 완전히 도외시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2년 연속 두 자릿수 인상에 일조한 셈이 됐다.
보수진영은 부동산 정책 실패를 이유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경질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대책을 스무번 넘게 내놓고도 시장 안정에 성공하지 못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2020년 12월에야 마지못해 응했다.
진보진영은 경실련을 제외하면 김 장관의 교체 요구에 신중했다. 보수진영이 부동산 규제를 모두 풀고 시장에 맡기라는 잘못된 주장을 하는데, 진보진영까지 장관 교체를 요구하면 정부의 정책 기조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다. 하지만 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이미 깨진 상태였다.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였더라도 진보진영이 장관 교체 요구를 안 했을까? 국민의 눈이 아니라, 집권세력의 눈으로 판단한 것은 아닐까?
송영길 민주당 대표가 ‘조국 사태’에 대해 사과했다. 조 장관 자녀의 입시비리 의혹에 대해 “청년에게 좌절과 실망을 주는 일이었다. (중략) 국민과 청년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진보진영은 ‘조국 논란’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긍정 평가했다. 민주당의 일부 강성 당원들이 반발하는 것에도 제동을 걸었다.
진보진영이 이렇게 제3자적인 관전평만 하는 것으로 충분한지는 의문이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면서 공정과 정의를 누구보다 크게 외치고 남을 단죄했던 우리가 스스로에게도 그런 원칙을 지켜왔는지 반성해야 한다”는 송 대표의 지적은 집권세력뿐만 아니라 진보진영 전체에도 해당한다. 검찰개혁을 앞세워 청년층과 이탈한 지지층의 실망한 목소리에 귀를 닫지는 않았는지? 여권이 오판했을 때 침묵을 지키거나 오히려 부추기는 일은 없었는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의 남은 임기 1년 동안 반성과 성찰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집권세력만의 일이 아니라, 진보진영 전체의 몫이다. ‘내로남불’로 국민의 신뢰에 금이 간 것은 진보진영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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