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6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도심 한복판의 대형 빌딩에서 나흘에 걸쳐 62시간 연속 근무를 하던 49살 경비노동자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숨졌다. 젊은 사람도 감당하기 어려운 초장시간 노동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불 보듯 하다. 이런 살인적인 노동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라 할 수도 있겠지만, 윤석열 정부가 ‘주 69시간제’를 밀어붙이는 가운데 벌어진 우리 노동 현장의 엄연하고 참담한 현주소다.
<한겨레> 보도를 보면, 고인의 근무일지에는 지난 5일 오후 4시부터 9일 새벽 4시까지 총 84시간 교대 없이 당직근무를 서는 걸로 돼 있다. 예정된 근무시간은 끝내 채우지 못했다. 고인은 가족에게 ‘9일 새벽에 들어오겠다’며 이불을 들고 출근했다고 한다. 가족과 동료들은 지난달 동료 일부의 퇴사로 결원이 생긴 뒤부터 과로에 시달려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병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회사 쪽은 고인이 자발적으로 근무를 하다 ‘병사’했다고 주장한다.
이번 사건으로 경비·보안업체에 만연한 장시간·야간 노동의 실태가 다시 한번 드러났다. 근로기준법은 경비노동자 등 감시·단속적 노동자를 대부분의 노동시간 규정에서 제외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등은 장시간 노동이 우울증, 뇌졸중 등 심각한 질환을 유발한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정부는 제도의 사각지대는 그대로 둔 채,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설령 회사 쪽 주장대로 고인이 자발적으로 장시간 근무를 했다고 해도,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강제노동’이나 다름없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의 함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부는 ‘장시간 몰아치기 노동’에 대한 보완책으로 노동시간 변경을 노동자나 노동자 대표가 ‘자발적’으로 회사 쪽과 합의하도록 한다는데, 고인 같은 미조직 노동자들에게는 전혀 ‘자발적’이 될 수가 없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지난해 접수된 휴가 관련 제보 가운데 41.9%가 연차휴가를 쓰지 못하거나 수당을 받지 못한 경우였다고 12일 밝혔다. 연차휴가를 가려고 상사에게 안마를 해줘야 했다는 등 기막힌 사연도 부지기수였다. 이런 특별한 사례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직장인들이 정해진 연차휴가도 다 소진하지 못하는데, 초과근로한 만큼 휴가가 더 생긴들 무엇 하겠는가. 정부의 공언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알 수 있다. 정부가 그토록 치켜세우는 이른바 ‘엠제트(MZ)노조’조차 노동시간 유연화를 반대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