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보기관이 한국 국가안보실을 도·감청한 정황이 미 국방부 기밀문서 유출로 드러났다. 미국 국방부 청사 모습.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 국가안보실을 훤히 들여다보며 도청을 하고 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국가안보의 핵심부가 뚫린 엄중한 상황이어서 매우 당혹스럽다. 그런데 더욱 당혹스러운 건 대통령실 반응이다. 미국에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요구는 한마디도 없다. 이달 말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을 앞두고 미국 눈치를 보며 파장을 최소화하는 데 급급한 모습이다.
소셜미디어에 유출된 100여건의 미 국방부 기밀문서 가운데 일부에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제공하도록 요구하자 한국 국가안보실이 이에 응할지에 대해 고심하는 논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겼다. 얼마 전 물러난 김성한 당시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당시 외교비서관의 3월 초 대화 내용이 옆에서 엿들은 듯 생생하다.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등 미 언론들은 이 정보의 출처가 ‘시긴트’(신호 정보)라고 보도했다. 시긴트는 전자장비로 취득한 정보인데, 미 정보기관이 한국 국가안보 핵심 당국자들의 대화를 도·감청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미 동맹의 신뢰를 뒤흔드는 것이자, 주권 침해 소지가 크다.
지난 주말부터 미 언론 보도로 국제적 파문이 일고 있는데도, 대통령실은 ‘한-미 동맹을 흔들 만한 사안은 아니라’고 먼저 선을 긋고 미국의 잘못을 감싸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 당연히 취해야 할, 미국에 대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요구를 비롯한 공식 입장은 한마디도 내놓지 않고 있다. 여야 정치권 모두에서 대통령실의 저자세 외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대통령실 관계자는 10일 해당 문서의 신빙성부터 따져봐야 한다며 ‘자료 조작설’을 제기했다. “(한·미) 양국 상황 파악이 끝나면 우리는 필요할 경우에 미국 측에 합당한 조치를 요청할 계획”이라는 입장을 마지못한 듯 내놓으면서도,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이번 사건을 과장하거나 혹은 왜곡해서 동맹 관계를 흔들려는 세력이 있다면 많은 국민에게 저항받게 될 것”이라고 엉뚱하게도 국내 비판에 화살을 돌렸다. 아무리 미국이 한국의 안보에 절대적인 영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이해하기 힘든 태도다.
2013년 10월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감청이 폭로되었을 때, 독일·프랑스·브라질 등은 대통령과 총리가 직접 나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며 강하게 항의했고, 미국은 동맹을 감청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공개 약속을 해야 했다. 동맹 사이에도 주권을 훼손하는 행위에는 단호하게 대응해야, 동맹의 신뢰를 유지하고 국익을 지킬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방문에 이번 사태의 불똥이 튈까 봐 전전긍긍하며 스스로 한국의 외교 원칙을 훼손하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등 주요 산업에서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날로 악화되는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미국 입장부터 감싸는 태도가 더욱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