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제조사가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본 하급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9일 이정일 변호사(원고 대리인)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사가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처음으로 나왔다. 그동안 폐 질환 발병과 가습기 살균제의 관련성이 낮은 것으로 판정받은 피해자에 대해서는 기업이 책임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적극적 피해자 구제에 나서는 대신 법적 공방으로 맞서온 기업들이 이번 대법원 판결 취지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9일 대법원은 가습기 살균제 3단계 피해자인 김아무개씨가 제조·판매사인 옥시레킷벤키저와 한빛화학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두 회사는 김씨에게 위자료 500만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해야 한다. 김씨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다가 2010년 폐 질환에 걸렸고 현재까지 치료를 받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초기에 정부는 폐 손상 기준을 1~4단계로 구분했는데, 김씨는 가습기 살균제와의 관련성이 낮은 3단계 판정을 받았다. 이후 2017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 특별법이 시행된 뒤 인정 범위가 확대되면서 김씨도 구제 대상으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옥시는 특별법 제정 취지를 외면한 채, 피해자 인정을 받은 이들에 대해서도 배상을 하지 않고 버티기로 일관해왔던 것이다.
이날 대법원 판단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건강이 손상된 피해자에게 ‘다른 원인이 있음’을 가해 기업이 증명하지 못한다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노출과 건강상 피해 발생 간에 의학적 개연성과 시간적 선후관계가 인정되면 폭넓게 피해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관련 민사소송에서 가해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적극적으로 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참사가 세상에 알려진 지 벌써 12년이 흘렀지만, 사법적 판단은 매우 더디게 나오고 있다. 김씨와 같은 3·4단계 피해자들은 개별적으로 소송전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데, 아직 1심 판결조차 나오지 않은 경우가 수두룩하다. 이 때문에 신속한 피해구제를 위해 마련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는 지난해 3월 해당 기업 9곳에 최대 9240억원을 마련하라고 주문했지만, 분담액 비중이 높은 옥시와 애경의 반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지난 9월 국회 공청회에서도 두 기업은 공정한 분담률 확보가 우선이라며 거부 입장을 고수했다. 이제라도 전향적 태도로 피해자 배상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