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맨 왼쪽)가 지난해 10월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대회의실에서 열린 일제 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판결을 이행하지 않는 일본 기업들의 자산을 강제로 매각해 현금화할 수 있는 법적 절차가 시작됐다.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은 최근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에 대해 채권압류명령결정 등을 수령해 가라는 공시송달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에서 승소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상 요구를 일본 기업들이 계속 거부하자 피해자들은 어쩔 수 없이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압류에 나섰다. 일본 기업들은 관련 서류 접수를 거부하는 방법으로 시간을 끌어왔지만, 서류가 전달된 것으로 간주하는 공시송달로 현금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수 있게 됐다.
일본 정부는 현금화가 실행되면 보복에 나서겠다고 공언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4일 “압류 자산 현금화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한다”며 “모든 선택지”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들은 한국 기업 자산 압류나 한국산 제품 관세 인상 등을 보복 조처로 거론한다. 일본이 끝내 배상을 거부해 실제로 현금화가 이뤄지면 한-일 관계는 다시 격랑 속에 휩싸일 것으로 예상된다.
한-일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도록 양국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할 때다. 먼저 일본 정부는 명분도 실익도 없는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처를 조속히 철회해야 한다. 일본은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지난해 7월 수출규제를 강행했고, 우리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선언으로 맞대응했다. 그러다 우리 정부가 지난해 11월 지소미아 종료 유예를 발표하면서 일본 정부도 수출규제 조처를 풀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이 강제동원 배상 문제 해법을 먼저 내놔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수출규제 철회를 계속 미뤘다.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가 문제 해결 의지가 없다고 보고 지난 2일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를 재개했다.
이번 공시송달 결정의 효력은 올해 8월4일 발생하고 연말에는 일본 기업 자산 매각 절차가 집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코로나19와 미-중 신냉전으로 세계적 혼란이 심화하는 가운데, 한국과 일본이 상호 보복에 나선다면 양국 모두 큰 피해를 볼 수 있다. 두 나라 정부는 공동의 위기의식을 갖고 대화의 장에 나서야 한다. 특히 가해자인 일본 정부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을 버리고 결자해지의 자세를 보이는 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