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주 경기연구원장(왼쪽)과 윤홍식 인하대 교수가 한겨레신문사에서 기본소득을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기본소득 논쟁이 활발하지만 ‘정책’으로서의 기본소득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체로 기본소득의 철학을 중심으로 한 주장과 기본소득을 둘러싼 오해를 바탕으로 한 비난이 공론장을 채우기 일쑤다. <한겨레>는 최근 기본소득과 복지국가 분야의 두 전문가와 함께 기본소득에 관한 대담을 나눴다. 기본소득의 비판적 지지자이면서 복지국가를 잘 키워나가는 것이 빈곤 문제 해결에 더 적합하다고 믿는 윤홍식 인하대 교수와 현실성을 갖춘 기본소득의 다양한 가능성을 고민하고 설계하는 이한주 경기연구원장이다.
―지금 한국에서 기본소득 논의에 불붙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한주(이하 이) “진원지는 경기도다. 성남과 경기도의 청년 기본소득 시도가 있었고, 지난해 3월 이재명 경기지사가 코로나19 재난기본소득을 제안했다. 그 뒤에 김경수 경남지사부터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도 힘을 보태, 결국 1차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지급하게 됐다. 그 뒤 모두 기본소득의 정치적 영향력을 인식하게 된 거다.”
윤홍식(이하 윤) “1987년 이후 한국의 복지 확대 양상을 보면 두가지 요건이 있었다. 보편적 경제위기와 전국적 선거. 이 두가지가 결합하면 폭발적으로 복지 논의가 일어난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대선과 맞물려 기초생활보장제 도입으로 이어졌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총선이 겹쳐 무상급식 논쟁 등 보편복지 논의로 번졌다. 지금도 코로나19 위기와 지난해 총선, 이어지는 대선까지 조건이 충족됐다.”
―기본소득 논의는 어디까지 왔을까? 혹시 아쉬운 점은?
윤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비판을 계속 받다 보니, 현실성을 반영해 지급액 수준이 낮아졌다. 그러다 보니 완전 기본소득으로 전환할 방법을 못 보여주고 있다. 이유는 뭔지, 완전 기본소득으로 가려면 뭐가 필요한지, 설명해야 한다. 기본소득주의자들은 그저 ‘일단 기본소득 맛을 보면 완전 기본소득에 동의할 것’이라는 논리를 펴니 납득하기 어렵다.”
이 “과거 산업사회의 노동, 노동자, 자본가 개념이 희미해지고 플랫폼 노동이 나오면서 상황이 복잡해지고 있다. 기본소득은 코로나19 위기로 인해 갑자기 앞으로 나온 거다. 인간의 실질적 자유를 위해 기본소득 얼마를 줘야 하고 얼마가 필요할지, 복지체계 전환이라든지 재정적 충분성 등…. 이제부터 담론 형성이 중요하다.”
한겨레신문사에서 기본소득을 주제로 대담하고 있는 이한주 경기연구원장.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기본소득의 ‘정책 가성비’를 두고 찬반이 크게 갈리곤 한다.
윤 “기본소득이 분배체계의 대안이 아니라 복지정책 중 하나가 되면 다른 정책과 비교될 수밖에 없고 정책 가성비 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정해진 자원 속에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때는, 당연히 취약계층에 집중하는 게 똑같이 나누는 것보다 백이면 백 더 낫다. 물론 연대나 인권처럼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걸 이야기하려면 기본소득은 복지정책 중 하나가 아니라 새로운 분배 담론이어야 한다. 기본소득을 사회정책의 하나로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현실적인 태도지만, 대안 담론으로서의 기본소득을 잃지 않으면 좋겠다.”
이 “기본소득은 사람은 모두 동등하고 우리 공동체는 인류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이 있으니, 그 자산과 자산에서 발생한 수익은 동등하게 나눠야 한다는 거다. 문화든 소득이든 한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누리는 것들이 점점 두터워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공유부가 분명 두터워져왔기에 기본소득주의자들은 그걸 나누는 방향으로 간다는 확신이 있다.”
―기본소득의 ‘공유부’ 철학이 생소하다는 점도 기본소득 찬반을 가르는 요인으로 보인다.
윤 “1958년에 로버트 솔로라는 경제학자가 성장이론을 발표했다. 경제성장의 핵심 요인으로 자본과 노동을 꼽지만 그걸로 설명되지 않는 요인(총요소생산성)이 80%가 넘는다는 내용이다. 솔로는 그게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인류 공통의 지적 유산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공유부를 꼭 엔(n)분의 1로 나눠야 하나? 복지국가에서 부자들에게 세금 더 걷어서 사회보장 만들고 인프라 깔고 무상교육 하는 것도 공유부를 나누는 방식이다.”
이 “기본소득론자들은 복지가 아니라 인권과 평등을 이야기한다. 복지국가의 원리는 사람은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할 수 없는 자는 연대로 보호한다는 거다. 일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돈 때문에 억지로 일하지는 말자는 거다. 노동 여부와 관계없이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실질적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 그러니 엔분의 1로 가는 거다.”
윤 “지금 말씀하신 건 이념형 기본소득이다. 실제로는 노동과 함께 가야 하는데 논의하다 보면 자꾸 이념형과 현실형이 왔다 갔다 한다.”
이 “‘왜 이념과 현실을 왔다 갔다 하냐’는데 세상에 안 그런 게 뭐가 있나.(웃음) 최근 경기연구원은 기본소득과 기본서비스를 같이 묶는다. 예컨대 기본에너지는 얼어 죽거나 더워 죽지 않을 만큼의 에너지를 모두에게 기본으로 주고 나머지는 사서 쓰자는 거다. 기본대출은 모두에게 1등급 신용을 일정 금액만큼 제공하자는 거다. 보편성을 강조하고 소득 심사를 하지 않는다면 소득을 지급하든 특정 재화·용역을 지급하든 차이가 없다고 본다.”
―기본소득이 대안으로서 논의되는 배경에는 기존 복지제도의 오작동이 있다.
윤 “팬데믹은 복지국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드러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한국처럼 재난지원금 뿌린 나라가 많지 않다. 소득보장, 세금 지원, 고용 유지에 현금지출을 늘린 나라도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미국 정도다. 반면 북유럽의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의 지출 증가는 굉장히 적었다. 원래 복지지출이 많았던 나라는 덜 지출하고 원래 복지지출이 적은 나라는 많이 지출했다. 보편적 복지체제가 잘 갖춰진 나라는 추가 지출 없이 외부 충격을 견뎠다는 거다.”
―코로나19 위기를 떠나서 고용 형태가 형해화되고 산업 형태가 바뀌는 등 기존 고용관계를 중심으로 한 복지국가론 자체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 “좋은 일자리와 나쁜 일자리의 양극화가 문제의 핵심인데, 국가가 노동을 어떻게 정의하고 개입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상이하다. 노동의 역사를 봐도 어떤 노동이 유급인지 무급인지, 어떤 지위를 차지하는지는 정치의 결과다. 나쁜 일자리 증가가 디지털 기술 변화로 인한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전제하고 대안을 만드는 것은 적절치 않다. 혹시 기본소득이 노동시장 문제를 간과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지금 기술 개발이나 사회 전환 속도가 정해진 것도, 우리 사회의 예측이 통일된 것도 아니다. 다만 변화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변화를 불안해하고, 이런 변화를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것은 서로 인정해야 한다.”
―기존 복지체제도 갈 길이 먼데, 기본소득을 함께 키우는 것이 가능할까?
윤 “기본소득과 복지국가의 현대적 재구조화 사이에는 ‘보편적 사회수당 도입’이라는 큰 타협점이 있다. 아동수당을 아동 기본소득이라 부르고, 기초연금을 노인 기본소득이라 부르며 확대할 수 있다. 다만, 소액 기본소득을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문제가 걸린다. 1만원씩만 돌려도 5조원이 필요하고, 5만원씩이면 20조∼30조원이 필요한데 과연 그게 타당할까. 현실적으로 범주형 기본소득이 적절하다. 노인·아동·농민·청년 등에 먼저 실시하고, 모두에게 낮게 까는 전 국민 기본소득은 정책실험을 통해 다음에 추진해야 한다.”
이 “선험적으로 어떤 게 더 낫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기본소득을 어떻게 걷어서 어떻게 쓸지 잘 설계하면 복지국가와 거의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범주형 기본소득도 최근 경기도에서 농촌 기본소득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농촌 문제는 김영삼 정부 때부터 100조원 이상 들였지만 해결이 안 된다. 한 마을을 정해서 농촌 기본소득을 깔아주고 젊은 사람들이 그 지역에 몰리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늘어난다면, 이건 복지 차원을 넘어서는 성과다.”
한겨레신문사에서 기본소득을 주제로 대담하고 있는 윤홍식 인하대 교수.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복지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는 복지국가론이든 기본소득이든, 재정 중심주의를 깨야 하지 않을까?
윤 “최근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인플레이션 통제와 균형재정을 경제정책 기조로 삼던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2010년부터 고용과 소득보장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아이엠에프와 세계은행이 연례회동에서 긴축정책을 폐기했다. 앞으로 국가와 재정의 역할도 커질 거고 지난 40년 동안 줄어들었던 조세부담률도 전향적 검토가 시작될 수 있다. 그게 기본소득이든 복지국가 재구조화든 우리에게 유리해졌다. 문제는 한국 재정당국이 가진 부채 포비아다.”
이 “외환위기 때문에 재정당국은 그런 책임감이 있다. 특히 기획재정부 세제실은 자기 목숨처럼 여길 정도다. 하지만 최근에는 많은 분들이 재정 중심주의를 깨라고 이야기하니 조금은 변하는 것 같다. 다음 정부에서는 많이 변할 거다.”
윤 “기재부의 긴축과 재정균형의 틀을 깨는 것은 기본소득주의자와 복지국가론자가 함께 손잡고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가장 답답한 오해, 가장 황당한 신화는 무엇인가?
이 “기본소득을 적은 수준에서 시작한다는데도 바로 엄청난 돈이 드는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기본소득을 마치 다른 사회보장체제 다 쓸어버릴 위험한 정책 취급을 하면서 전혀 사실 아닌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자신의 현실성을 강조하려고 상대방을 완전히 이념에 가두는 거다.”
윤 “기본소득론자들이 세금 걷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싶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세금은 정치투쟁이 가장 심한 영역이다. 탄소세와 토지세를 말하는 건 너무 쉽지만 새로운 세목을 만드는 건 엄청난 계급투쟁이다. 또 내가 100원 내고, 기본소득으로 200원 받으면, 플러스(+)니까 지지할 거라는 가정도 일종의 신화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정책을 보지 않는다.”
―정치의 역할이 중요해 보인다.
이 “복지 그 자체가 정치다. 기본소득 주장으로 복지·진보진영이 더 풍부해지는 거다.”
윤 “기본소득의 공헌이다. 나는 기본소득 논의가 너무 반갑다. 분배 논의를 다시 전면에 부상시킨 거다. 그러니까 비판하더라도 ‘기본소득 안 돼’ 하고 치워버리는 건 적절치 않다. 어떻게 분배구조를 더 잘 만들어갈지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진행·정리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