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지방 칩거가 계속된 5일 오후 서울 서빙고동 이 전 총재의 집 앞에서, 출마를 촉구하는 지지자들(아래)과 출마를 규탄하는 출마반대자들이 거리를 사이에 두고 각각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1997년 대쪽·반부패→2002년 합리적 중도보수
2007년엔 ‘친북좌파정권 종식’으로 명분 우향우
2007년엔 ‘친북좌파정권 종식’으로 명분 우향우
1997년 대선에 처음으로 출마한 이회창 전 총재의 정치적 자산은 ‘대쪽’이었다. 정치 데뷔의 이유도 청렴과 개혁이었다. 감사원장·총리 재임시절 그는 대통령과 ‘맞장’뜨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이 전 총재는 3김시대의 ‘가족정치’에 맞서, ‘법’과 ‘제도’를 내세우면서 대외적으론 ‘반부패’를, 당내에선 ‘정당 민주화’를 외쳤다”고 말했다.
하지만 97년 선거 때 친동생 회성씨가 국세청을 동원해 166억원을 모은 ‘세풍 사건’으로 실형을 받아 대쪽 이미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선 직후 곧 번져나가는 ‘이회창 대세론’을 등에 업고 그는 다시 당 총재로 복귀해 당권과 대권을 모두 거머쥔다. 특히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방패막이가 돼줬던 고 김윤환 전 의원과 이기택 전 의원을 공천에서 탈락시킨다. 이런 과정에서 그에겐 ‘제왕적 총재’란 별명이 붙었다. 한 민주계 당직자는 “(이 전 총재는) 본래 ‘보스정치’에 반대해 정계에 진출했는데, 결국엔 자기도 독선적 리더십을 되풀이하면서 명분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했다.
2002년 두번째 대선에서 그가 내세웠던 명분은 ‘부패정권 심판론’이었다. 세풍·안풍·병풍에 휘말려 본인의 청렴한 이미지는 많이 탈색된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브랜드는 법과 원칙이었다. 정치권에선 이 전 총재가 애초 지향했던 것은 ‘합리적 중도보수’였다고 말한다. 16대 국회 때 원희룡·오경훈·오세훈 등 ‘젊은 피’를 영입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는 지난 2002년 정계은퇴를 밝히는 기자회견에서도 “한나라당이 진정 건전하고 합리적인 개혁적 보수의 길을 간다면 국민들이 손을 들어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로부터 5년 뒤, 출마 선언을 앞둔 그의 명분은 ‘좌파정권 종식’으로 바뀌었다. 99년 초 한나라당 원내대표였던 이부영 전 의원은 “이 전 총재는 남북문제에 있어서만은 백지상태”라고 말한 바 있다. 정치컨설턴트 박성민(민 기획 대표)씨는 “총재 시절의 이 전 총재는 ‘친북좌파’ 같은 단어를 편안해하지 않았다. 그때와 비교하면 그는 점점 오른쪽으로 걸어왔다”며 “본인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정치권에 입문한 이래 계속 보수화되면서 세상의 변화를 잘 읽지 못하는 것 같다”고 평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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