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청계천 복원 2주년을 맞은 지난 9월 청계천 광통교 부근 징검다리에서 시민들을 향해 팔로 ‘하트’를 그려보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대선후보 리더십 검증] 이명박
12월19일 대선에서 당선된 이가 국정을 어떻게 이끌어갈지를 지금 정확하게 전망하긴 어렵다. 선거 구호와 공약은 대개 장밋빛으로 꾸며진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에서 어떤 지도력과 업적을 남겼는가를 살펴보면, 미래의 국정운영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공직과 기업운영 등에서 주요 대통령후보들이 보여준 리더십을 해부해본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업무추진 스타일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마케팅 리더십’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서울시장 재직 시절 ‘행정 소비자’들의 욕구를 재빨리 읽어 ‘신상품’을 출시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포장하는 능력을 입증했다. 먼지 날리는 콘크리트 고가를 2년3개월만에 맑은 물이 흐르는 명소로 바꾼 청계천 복원사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빠른 시간 안에 반드시 성과를 봐야 하는 통제적 리더십은, 시정 운영에 필수적인 민주주의적 절차를 취약하게 하고 사업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받는다.
청계천·버스차로 등 속도감있게 추진
서울광장 디자인 일방 변경, 절차 뒷전
의욕 앞서 ‘설익은’ 사업 발표 혼선도 ■ 빠른 게 선이다= 이 후보의 서울시장 시절을 돌아보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속도감있게 사업들이 추진됐다. 2002년 취임 직후 대표 공약이었던 청계천 복원사업에 돌입한 데 이어 2003년엔 뉴타운계획을 발표했고, 2004년엔 버스체계 개편을 선보였다. 2005년 6월 서울숲 개장에 이어 같은 해 10월엔 청계천 복원을 마무리지었다. ‘교통섬’이었던 서울시청 로터리를 광장으로 바꿨고, 광화문엔 보행자를 위한 건널목이 놓였다. 포장술도 뛰어났다. 서울광장은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을 설치해 인기를 모았고, 청계천 복원 이후엔 작가들에게 작품 제작비를 지원해 청계천을 소재로 한 소설집을 내도록 했다. 그는 자신을 ‘문화시장’이자 ‘환경시장’으로 내세웠다.
■ 조직 장악력= 이 후보는 청계천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앞세워 조직 전체를 몰아세우며, 그 과정에서 개개인의 성과를 평가했다. 서울시장 재직 당시 이 후보는 매주 토요일 오전 ‘청계천복원사업 대책회의’를 열어, 공사의 난제를 의논하고 일정을 확인했다. 이 때 담당 공무원들은 “완전 연소되는 느낌” 이라는 말을 했다. 당시 청계천 상인대책 업무를 맡았던 한 공무원은 “낮이고 밤이고 상인들을 만나느라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놓고 생활했다”고 말했다. 2003년 7월1일 고가 철거 디데이를 20일 앞둔 때까지도 서울시는 공사에 반대하는 상인들과 협상을 끝내지 못했지만, 이 후보는 공사 시작일을 늦추지 않았다. 시장의 확고한 의지로 인해, ‘상인팀’ 공무원들은 청계천 상인을 4200번이나 만나며 설득 작업을 벌였다.
■ 민주주의 절차의 부재=역설이지만, 애초 청계천사업을 반대했던 이들은 이 후보와 ‘코드’가 비슷한 교통·토목 전문가들이었고, 복원을 지지했던 이들은 소설가 박경리씨를 포함해 70년대식 개발주의를 혐오하는 환경·문화 전문가와 시민단체였다. 그러나 ‘역사문화의 복원’이라는 원칙을 내세우며 청계천 복원에 참여했던 이들은 사업이 진행되면서 서울시와 삐걱거리게 되고, 2004년 5월 청계천시민위원 20여명이 사퇴하고야 만다.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던 노수홍 교수(연세대 환경공학과)는 “자연하천에 가까운 설계안으로 바꾸자거나 석축·다리 유구 등을 살리자는 의견이 쏟아졌지만, 서울시는 이를 일부 소수 위원들의 개인 견해로 매도했고 점점 시민위원회를 무시했다”고 말했다.
서울광장 공사도 시간과 돈을 우선시하는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서울광장을 만들면서 애초 설계안으로 당선된 ‘빛의 광장’을 공사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설계자 양해도 얻지 않은 채 잔디를 까는 디자인으로 바꿔 비난을 받기도 했다.
■ 말이 먼저=마음이 급하다보니, 미처 무르익지 않은 사업을 마구 발표했다가 혼선을 빚었다. 이 후보와 서울시에서 함께 일했던 한 고위 간부는 “그의 입은 (실제 진행되는 일보다) 한발 먼저 나갔다. 누군가 옆구리를 찌르며 말려줘야 했다”고 말한다. 지난해 1월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과천 서울대공원에 디즈니랜드를 유치하겠다. 한두달 안이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곧 서울시의 한 간부가 직접 홍콩 디즈니랜드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이 계획은 백지화됐다. 사업성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서울시장 시절 보여준 이 후보의 몰아치는 업무 스타일을 국정 운영에 대입하면 어떻게 될까? 성과와 속도, 효율이 이 후보 국정 운영방식의 키워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자원배분의 왜곡과 불균형, 내실없는 외형주의, 민주주의 부재라는 값비싼 대가가 뒤따를 수 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한번 믿으면 끝까지 밀어줘…공·사 구분없어 ‘독단’ 평가도
인사스타일 이명박 후보의 서울시장 재직 시절 인사스타일은 한마디로 확실한 ‘자기 사람 챙기기’로 요약할 수 있다. 도덕성이나 인화보다는 생산성이 높은 이들을 중용했고, 한번 책임을 맡기면 끝까지 밀어줘 확실한 ‘내 사람’으로 만들었다. 공사 구분에 대한 인식이나 공직자로서의 주변 정리엔 소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시장 시절 이 후보 밑에서 일했던 과장 ㅈ씨는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가도 금방금방 요점을 잡아내고 정확한 지시를 했다”며 “핵심을 잘 파악하고 판단이 빨랐다”고 말한다. 그러나 ㅊ씨는 “전임 시장들은 가끔씩 일요일에 시청에 나와 휴일 근무를 하고 있는 직원들을 불러 점심을 사주며 위로했지만 이 후보는 거의 그런 일이 없었다”며 “능률을 중시해서 그런지 일부 총애하는 사람들 말고는 정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효율을 중시하다보니 공익성을 소홀히 했다는 평가도 많다. ㅋ 과장은 “서울시 사업으로 특정 업체가 혜택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 시장에게 특혜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하자, ‘당신은 일만 잘하면 되지 기업체가 특혜를 받고 안 받고가 그리 중요하냐’라고 말했다”며 “기업과 달리 행정의 기본은 공공성인데 이를 소홀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특정 지역 차별 인사도 내내 도마에 올랐다. 첫 인사에서 승진대상 우선 순위였던 호남 출신 간부가 ‘한직’으로 발령받고 승진에서도 누락되자 ‘살생부’가 집행됐다는 얘기가 퍼졌다. 비호남 출신으로 인사 담당을 맡았던 ㅂ씨는 “이 시장이 지역 안배를 신경쓰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시장 재임 시절 서울메트로 등 시 산하기관의 사외이사 대부분을 한나라당 사람들로 채운 것도 입길에 오른다. 시장 임기 말인 2006년 6월 서울시 5개 투자기관 사외이사 25명 중 한나라당 출신 인사는 모두 16명이었다. 전임 시장들이 대개 회계사·변호사·시민단체 간부·대학교수 등으로 임명했던 자리를 당료들로 채워버린 것이다. 특히 이 후보는 기관 내부에서 추천하던 사외이사들에 대해, 시장이 추천권과 승인권을 모두 갖는 것으로 규정을 바꿔 한나라당 인사를 손쉽게 선임했다. 이 때문에 감사원 지적과 개선 권고를 받았다. 한 투자기관의 고위간부 ㅌ씨는 “공직을 지내보지 않은 탓인지 이 후보는 산하기관 사외이사 쯤은 자기 사람으로 심어도 별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공직자로서 공사 구분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불도저식 일처리 위기대응 떨어져
이라크 공사 등서 ‘쓴맛’ 이명박 후보가 ‘무용담’으로 내세우는 현대건설 시절 이라크 공사 수주는 거꾸로 이 후보의 모험주의 노선의 실패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무렵 회사 내부에서도 ‘리스크가 가장 높은 나라’라는 분석이 나왔지만,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회장은 이라크에 ‘올인’했다. 91년 걸프전이 터지면서 이라크 미수금은 현대의 목을 죄어왔다. 75~86년 이라크에서 벌인 26개 사업의 공사대금 41억달러(이자·원금 합계) 가운데, 92년 초 이 후보가 현대를 떠날 때엔 25억달러(이자·원금 합계) 정도만 회수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후보는 81년 이후부터 대손충당금을 한 푼도 적립하지 않았다. 현대건설은 끝내 2000년 10월 1차 부도를 맞고 이듬해 6월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회계사 최영태(참여연대 조세개혁센터 소장)씨는 “채권 회수가 의문시된 상황이었는데도, 본인은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대손충당금을 전혀 쌓지 않은 것은 부실의 요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비비케이(BBK) 사업도 이 후보의 불도저식 도전이 낳은 실패작이다. ‘노병의 신화’를 이루겠다며 첨단금융업에 손을 대 ‘건설맨’에서 ‘금융맨’으로의 재기를 시도했지만, 결국 수십억원의 손해를 본 채 사업을 접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서울광장 디자인 일방 변경, 절차 뒷전
의욕 앞서 ‘설익은’ 사업 발표 혼선도 ■ 빠른 게 선이다= 이 후보의 서울시장 시절을 돌아보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속도감있게 사업들이 추진됐다. 2002년 취임 직후 대표 공약이었던 청계천 복원사업에 돌입한 데 이어 2003년엔 뉴타운계획을 발표했고, 2004년엔 버스체계 개편을 선보였다. 2005년 6월 서울숲 개장에 이어 같은 해 10월엔 청계천 복원을 마무리지었다. ‘교통섬’이었던 서울시청 로터리를 광장으로 바꿨고, 광화문엔 보행자를 위한 건널목이 놓였다. 포장술도 뛰어났다. 서울광장은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을 설치해 인기를 모았고, 청계천 복원 이후엔 작가들에게 작품 제작비를 지원해 청계천을 소재로 한 소설집을 내도록 했다. 그는 자신을 ‘문화시장’이자 ‘환경시장’으로 내세웠다.
이명박 후보 서울시장 때 주요 사업
한번 믿으면 끝까지 밀어줘…공·사 구분없어 ‘독단’ 평가도
인사스타일 이명박 후보의 서울시장 재직 시절 인사스타일은 한마디로 확실한 ‘자기 사람 챙기기’로 요약할 수 있다. 도덕성이나 인화보다는 생산성이 높은 이들을 중용했고, 한번 책임을 맡기면 끝까지 밀어줘 확실한 ‘내 사람’으로 만들었다. 공사 구분에 대한 인식이나 공직자로서의 주변 정리엔 소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시장 시절 이 후보 밑에서 일했던 과장 ㅈ씨는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가도 금방금방 요점을 잡아내고 정확한 지시를 했다”며 “핵심을 잘 파악하고 판단이 빨랐다”고 말한다. 그러나 ㅊ씨는 “전임 시장들은 가끔씩 일요일에 시청에 나와 휴일 근무를 하고 있는 직원들을 불러 점심을 사주며 위로했지만 이 후보는 거의 그런 일이 없었다”며 “능률을 중시해서 그런지 일부 총애하는 사람들 말고는 정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효율을 중시하다보니 공익성을 소홀히 했다는 평가도 많다. ㅋ 과장은 “서울시 사업으로 특정 업체가 혜택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 시장에게 특혜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하자, ‘당신은 일만 잘하면 되지 기업체가 특혜를 받고 안 받고가 그리 중요하냐’라고 말했다”며 “기업과 달리 행정의 기본은 공공성인데 이를 소홀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특정 지역 차별 인사도 내내 도마에 올랐다. 첫 인사에서 승진대상 우선 순위였던 호남 출신 간부가 ‘한직’으로 발령받고 승진에서도 누락되자 ‘살생부’가 집행됐다는 얘기가 퍼졌다. 비호남 출신으로 인사 담당을 맡았던 ㅂ씨는 “이 시장이 지역 안배를 신경쓰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시장 재임 시절 서울메트로 등 시 산하기관의 사외이사 대부분을 한나라당 사람들로 채운 것도 입길에 오른다. 시장 임기 말인 2006년 6월 서울시 5개 투자기관 사외이사 25명 중 한나라당 출신 인사는 모두 16명이었다. 전임 시장들이 대개 회계사·변호사·시민단체 간부·대학교수 등으로 임명했던 자리를 당료들로 채워버린 것이다. 특히 이 후보는 기관 내부에서 추천하던 사외이사들에 대해, 시장이 추천권과 승인권을 모두 갖는 것으로 규정을 바꿔 한나라당 인사를 손쉽게 선임했다. 이 때문에 감사원 지적과 개선 권고를 받았다. 한 투자기관의 고위간부 ㅌ씨는 “공직을 지내보지 않은 탓인지 이 후보는 산하기관 사외이사 쯤은 자기 사람으로 심어도 별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공직자로서 공사 구분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불도저식 일처리 위기대응 떨어져
이라크 공사 등서 ‘쓴맛’ 이명박 후보가 ‘무용담’으로 내세우는 현대건설 시절 이라크 공사 수주는 거꾸로 이 후보의 모험주의 노선의 실패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무렵 회사 내부에서도 ‘리스크가 가장 높은 나라’라는 분석이 나왔지만,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회장은 이라크에 ‘올인’했다. 91년 걸프전이 터지면서 이라크 미수금은 현대의 목을 죄어왔다. 75~86년 이라크에서 벌인 26개 사업의 공사대금 41억달러(이자·원금 합계) 가운데, 92년 초 이 후보가 현대를 떠날 때엔 25억달러(이자·원금 합계) 정도만 회수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후보는 81년 이후부터 대손충당금을 한 푼도 적립하지 않았다. 현대건설은 끝내 2000년 10월 1차 부도를 맞고 이듬해 6월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회계사 최영태(참여연대 조세개혁센터 소장)씨는 “채권 회수가 의문시된 상황이었는데도, 본인은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대손충당금을 전혀 쌓지 않은 것은 부실의 요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비비케이(BBK) 사업도 이 후보의 불도저식 도전이 낳은 실패작이다. ‘노병의 신화’를 이루겠다며 첨단금융업에 손을 대 ‘건설맨’에서 ‘금융맨’으로의 재기를 시도했지만, 결국 수십억원의 손해를 본 채 사업을 접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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