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무소속 후보가 지난달 15일 서울 노량진의 한 분식집에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청년 구직자들과 만나 실업 대책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회창 대선후보 리더십 검증
제왕적 리더십 소유…정치력·포용력 부족해
비선 의존·측근 위주 인사 ‘배타적’ 지적
신중함 지나쳐 좌고우면 “출마 선언 늦었다” 이회창 무소속 후보의 리더십은 통상 ‘차가운 카리스마’로 요약된다. 대쪽, 엘리트주의 등의 표현이 그에게 따라붙었다.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국민들은 그의 이런 모습에 때론 열광하고, 때론 거북해하기도 했다. 그런 이 전 총재가 이번엔 ‘서민’ 행보를 하며 ‘따뜻한 카리스마’를 앞세워 세 번째 도전에 나섰다. ■ 제왕적 리더십=이 후보는 카리스마의 상징이었다. 거대 정당의 제왕적 총재란 후광에 전형적인 엘리트 출신, 철저한 일처리와 절제미 등이 섞여 만들어낸 결과다. 2002년 한나라당 후보 시절 그를 보좌했던 한 당직자는 “후보 시절 보고를 하러 들어온 의원들은 대부분 좌불안석이었다. 어떤 의원들은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다가 나갈 때는 신하가 임금 앞에서 물러나듯 뒷걸음치며 방을 나오곤 했다”며 당시 ‘위세’를 회고했다. 이 후보가 총리로 재직하던 시절의 한 측근은 “총리 시절 이 후보는 7∼8권 분량의 우루과이 라운드 농산물 협상 보고서를 꼼꼼히 챙겨 읽은 뒤 문제점을 제기해 당시 김영삼 정부의 실세이던 담당 장관을 경질하도록 했다”며 “업무능력에 쇼크를 받았다”고 술회했다. 그의 카리스마가 독선이나 이기주의에 가깝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나라당 당직자 출신의 한 보좌관은 “총재 시절 그는 당을 1인 지배체제로 완전히 장악했고, 비주류나 2인자는 용납하지 않았다”며 “한마디로 독선적이고 냉혹한 리더십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정치력이나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평도 있다. 이 후보는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후견인 구실을 하던 김윤환 전 의원이나 이기택 전 의원 등을 공천에서 배제했다. 과거 이 후보의 정치 자문역을 하던 한 인사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기보다는 자기가 감독·배우를 다 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 안팎에선 자신이 한나라당을 만들었고, 그 당에서 두 번이나 대선 후보로 나서 전폭 지원을 받았음에도 경선에 참여하지도 않고 뒤늦게 대선에 출마한 것은 어떤 명분 아래서도 이기적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 비선 정치 논란=감사원장, 국무총리, 한나라당 총재까지 이 후보는 가는 곳마다 단숨에 조직을 휘어잡았다. 이런 그의 조직 장악력을 ‘인사를 통한 장악’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감사원장 시절 그는 으레 보안기관의 몫이던 사무총장 자리를 처음으로 내부 승진해 황영하 전 총무처 장관을 기용했다. 국무총리 시절에도 정치인 몫이던 비서실장 자리에 이흥주 당시 제1행정조정관(현재 선대위 홍보특보)을 내부 승진시켜 단숨에 조직의 신망을 얻는다. 한나라당에 와서도 그는 서상목, 백남치 전 의원 등 이른바 ‘이마빌딩 7인방’을 측근으로 기용하고, 이후엔 신경식, 하순봉, 김기배 전 의원 등 중진 핵심들을 발판으로 당을 휘어잡았다. 그러나 이런 그의 인사 스타일은 배타적이고 지나치게 측근 위주란 비판이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자신이 엘리트 출신이라 그런지 사람을 쓸 때 경기고-서울대 출신을 선호한 면이 있다”며 “소수 측근들 외엔 교류가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대선 때 최측근이랄 수 있는 가족들의 결정을 당 기구보다 중시했다는 이야기도 끊이지 않았다. 대선 때 그를 도운 한 측근은 “2002년 대선의 텔레비전 광고 가운데 버스 편은 선대위 홍보 전문가들이 맨 마지막에 내보내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가족회의 뒤 이 광고가 1탄으로 바뀌었다. 공식 의사결정 기구가 허수아비가 됐던 셈이다”라고 말했다.
■ ‘타이밍의 정치’ 미숙 =이 후보는 결정을 내릴 때 숙고하는 편이다. 꼼꼼히 보고서를 검토하고 양쪽의 이야기를 듣는다. 2002년 대선 때 이 후보 비서실에서 일한 한 인사는 “겉으론 점잖지만 결정에 필요한 것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한다”고 말했다. 법관 시절 그는 중요한 판결을 앞두고는 끊임없이 마당을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두 번의 대선 실패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타이밍의 정치를 못 한다”고 비판한다. 지나치게 좌고우면해 실기가 잦았다는 것이다. 2002년 대선 당시 이 후보의 자택을 놓고 불거진 호화빌라 논란 때가 대표적이다. 당시 참모들은 “빨리 사과부터 하는 게 맞다”고 건의했으나 이 후보는 “법적으론 문제가 없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결국 여론의 뭇매를 맞고 일주일 뒤 사과를 해야 했다. 2002년 2월 당권-대권 분리 등을 요구하며 탈당했던 박근혜 전 대표를 선거 한 달을 남긴 11월에야 받아들인 일도 입길에 오른다. 한 정치권 인사는 “선거를 40여일 남겨둔 상태에서 한 이번 출마선언도 너무 늦었다. 정책, 조직 등 여러 준비를 제대로 갖추려 했다면 9월쯤엔 결단을 내렸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권력 의지 몸에 밴 ‘권위주의적 선비형’
전문가 시선 최진 대통령 리더십 연구소장은 이회창 무소속 후보가 “권위주의적 선비형” 리더십을 지녔다고 분석했다. 최 소장은 “이 후보를 연상하면 원칙주의적 판사의 이미지에 조선시대 완고한 선비의 이미지가 겹친다”며 “여기엔 대법관과 총리 등을 거치며 보여준 꼿꼿한 이미지가 있지만 동시에 엘리트주의적인 우월감도 함께 있다”고 말했다. 이 후보의 강력한 권력의지 역시 그의 리더십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대법관, 감사원장, 총리, 한나라당 총재를 거치며 항상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이런 의지가 체화됐다는 것이다. 세 번째 출마를 강행한 것도 이런 강한 권력의지 탓이라는 게 최 소장의 분석이다. 최 소장은 그의 이런 리더십 스타일이 이번 대선에서 단숨에 지지율 2위로 올라서는 기반이 됐다고 분석했다. 최 소장은 “지난 두 차례 대선에서 이 후보의 리더십은 답답하고, 시대착오적인 반개혁적인 이미지를 강화해 고배를 들었지만 이번 대선에선 외려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개혁을 표방한 현 정부가 아마추어리즘으로 표류하고, 5년 전보다 보수화된 사회에서 그의 리더십이 다시 눈길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비선 의존·측근 위주 인사 ‘배타적’ 지적
신중함 지나쳐 좌고우면 “출마 선언 늦었다” 이회창 무소속 후보의 리더십은 통상 ‘차가운 카리스마’로 요약된다. 대쪽, 엘리트주의 등의 표현이 그에게 따라붙었다.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국민들은 그의 이런 모습에 때론 열광하고, 때론 거북해하기도 했다. 그런 이 전 총재가 이번엔 ‘서민’ 행보를 하며 ‘따뜻한 카리스마’를 앞세워 세 번째 도전에 나섰다. ■ 제왕적 리더십=이 후보는 카리스마의 상징이었다. 거대 정당의 제왕적 총재란 후광에 전형적인 엘리트 출신, 철저한 일처리와 절제미 등이 섞여 만들어낸 결과다. 2002년 한나라당 후보 시절 그를 보좌했던 한 당직자는 “후보 시절 보고를 하러 들어온 의원들은 대부분 좌불안석이었다. 어떤 의원들은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다가 나갈 때는 신하가 임금 앞에서 물러나듯 뒷걸음치며 방을 나오곤 했다”며 당시 ‘위세’를 회고했다. 이 후보가 총리로 재직하던 시절의 한 측근은 “총리 시절 이 후보는 7∼8권 분량의 우루과이 라운드 농산물 협상 보고서를 꼼꼼히 챙겨 읽은 뒤 문제점을 제기해 당시 김영삼 정부의 실세이던 담당 장관을 경질하도록 했다”며 “업무능력에 쇼크를 받았다”고 술회했다. 그의 카리스마가 독선이나 이기주의에 가깝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나라당 당직자 출신의 한 보좌관은 “총재 시절 그는 당을 1인 지배체제로 완전히 장악했고, 비주류나 2인자는 용납하지 않았다”며 “한마디로 독선적이고 냉혹한 리더십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정치력이나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평도 있다. 이 후보는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후견인 구실을 하던 김윤환 전 의원이나 이기택 전 의원 등을 공천에서 배제했다. 과거 이 후보의 정치 자문역을 하던 한 인사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기보다는 자기가 감독·배우를 다 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 안팎에선 자신이 한나라당을 만들었고, 그 당에서 두 번이나 대선 후보로 나서 전폭 지원을 받았음에도 경선에 참여하지도 않고 뒤늦게 대선에 출마한 것은 어떤 명분 아래서도 이기적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 비선 정치 논란=감사원장, 국무총리, 한나라당 총재까지 이 후보는 가는 곳마다 단숨에 조직을 휘어잡았다. 이런 그의 조직 장악력을 ‘인사를 통한 장악’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감사원장 시절 그는 으레 보안기관의 몫이던 사무총장 자리를 처음으로 내부 승진해 황영하 전 총무처 장관을 기용했다. 국무총리 시절에도 정치인 몫이던 비서실장 자리에 이흥주 당시 제1행정조정관(현재 선대위 홍보특보)을 내부 승진시켜 단숨에 조직의 신망을 얻는다. 한나라당에 와서도 그는 서상목, 백남치 전 의원 등 이른바 ‘이마빌딩 7인방’을 측근으로 기용하고, 이후엔 신경식, 하순봉, 김기배 전 의원 등 중진 핵심들을 발판으로 당을 휘어잡았다. 그러나 이런 그의 인사 스타일은 배타적이고 지나치게 측근 위주란 비판이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자신이 엘리트 출신이라 그런지 사람을 쓸 때 경기고-서울대 출신을 선호한 면이 있다”며 “소수 측근들 외엔 교류가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대선 때 최측근이랄 수 있는 가족들의 결정을 당 기구보다 중시했다는 이야기도 끊이지 않았다. 대선 때 그를 도운 한 측근은 “2002년 대선의 텔레비전 광고 가운데 버스 편은 선대위 홍보 전문가들이 맨 마지막에 내보내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가족회의 뒤 이 광고가 1탄으로 바뀌었다. 공식 의사결정 기구가 허수아비가 됐던 셈이다”라고 말했다.
■ ‘타이밍의 정치’ 미숙 =이 후보는 결정을 내릴 때 숙고하는 편이다. 꼼꼼히 보고서를 검토하고 양쪽의 이야기를 듣는다. 2002년 대선 때 이 후보 비서실에서 일한 한 인사는 “겉으론 점잖지만 결정에 필요한 것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한다”고 말했다. 법관 시절 그는 중요한 판결을 앞두고는 끊임없이 마당을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두 번의 대선 실패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타이밍의 정치를 못 한다”고 비판한다. 지나치게 좌고우면해 실기가 잦았다는 것이다. 2002년 대선 당시 이 후보의 자택을 놓고 불거진 호화빌라 논란 때가 대표적이다. 당시 참모들은 “빨리 사과부터 하는 게 맞다”고 건의했으나 이 후보는 “법적으론 문제가 없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결국 여론의 뭇매를 맞고 일주일 뒤 사과를 해야 했다. 2002년 2월 당권-대권 분리 등을 요구하며 탈당했던 박근혜 전 대표를 선거 한 달을 남긴 11월에야 받아들인 일도 입길에 오른다. 한 정치권 인사는 “선거를 40여일 남겨둔 상태에서 한 이번 출마선언도 너무 늦었다. 정책, 조직 등 여러 준비를 제대로 갖추려 했다면 9월쯤엔 결단을 내렸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권력 의지 몸에 밴 ‘권위주의적 선비형’
전문가 시선 최진 대통령 리더십 연구소장은 이회창 무소속 후보가 “권위주의적 선비형” 리더십을 지녔다고 분석했다. 최 소장은 “이 후보를 연상하면 원칙주의적 판사의 이미지에 조선시대 완고한 선비의 이미지가 겹친다”며 “여기엔 대법관과 총리 등을 거치며 보여준 꼿꼿한 이미지가 있지만 동시에 엘리트주의적인 우월감도 함께 있다”고 말했다. 이 후보의 강력한 권력의지 역시 그의 리더십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대법관, 감사원장, 총리, 한나라당 총재를 거치며 항상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이런 의지가 체화됐다는 것이다. 세 번째 출마를 강행한 것도 이런 강한 권력의지 탓이라는 게 최 소장의 분석이다. 최 소장은 그의 이런 리더십 스타일이 이번 대선에서 단숨에 지지율 2위로 올라서는 기반이 됐다고 분석했다. 최 소장은 “지난 두 차례 대선에서 이 후보의 리더십은 답답하고, 시대착오적인 반개혁적인 이미지를 강화해 고배를 들었지만 이번 대선에선 외려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개혁을 표방한 현 정부가 아마추어리즘으로 표류하고, 5년 전보다 보수화된 사회에서 그의 리더십이 다시 눈길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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