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은 누구
3일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문재인(64) 전 대표는 누군가의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편이 훨씬 편안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유신반대 시위를 이끌던 대학생에서 인권변호사로 늘상 사회변혁에 앞장섰지만, 그는 언제나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자유인’의 생활을 갈망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운명’인 듯 정치로 호출됐던 그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며 정권교체를 외치는 ‘현실 정치인’으로 변모했다.
■ 운명 1953년 1월24일 경남 거제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문 후보는 가난 때문에 강냉이죽 급식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고, 월사금을 못내 수업 도중 쫓겨나는 아픔도 겪었다. 경남중·고등학교를 거쳐 재수로 경희대 법대(1972년)에 진학한 이후에는 공부보다는 유신반대 시위를 이끄는 데 앞장섰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하고도,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이 좌절된 그는 검사나 로펌행 대신 “서민들이 겪는 사건들 속에서 억울한 사람을 돕고 보람을 찾는 보통 변호사”를 선택했다.
그가 정치의 길에 나서게 된 것은 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문이었다. 아니, 운명이었다. ‘변호사 노무현’과 부산에서 함께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던 문 후보는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노 전 대통령의 부산선거대책본부장을 맡으면서,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맡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계속되는 권유에도 국회의원 선거 출마 등 정치 일선에 나서는 건 극도로 꺼렸다. 그를 정치의 한복판으로 호출한 건 2009년 5월23일 노 전 대통령 서거였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그는 결국 2011년 말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야권 대통합을 통한 민주통합당 창당에 참여했고, 2012년 4·11 총선 당시 부산 사상구에서 의원에 당선된 뒤 곧장 대선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그해 12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맞붙은 대선 결과는 51% 대 49%, 그에겐 뼈아픈 패배였다.
■ 권력의지 잠자고 있는 듯했던 그의 권력의지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건,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2·8 전당대회 때였다. 당시 당내 원로들은 물론 측근들도 ‘가만히 있으면 꽃가마 태워 대선으로 데려갈 텐데, 흠집만 잡힐 게 뻔한 대표를 맡아 뭘 하겠냐’고 말렸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녹아버린다”며 출마했다. 결국 당 대표가 됐지만, 이후 10개월은 가시밭길이었다. 대표 취임 뒤 두 달 만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한 직후 들끓기 시작한 ‘책임론’은 ‘초선 대표’의 리더십 논란으로 비화됐다. 또 ‘공천 혁신안’ 처리를 위해 당 대표직 재신임 투표까지 내걸었지만, 안철수 전 대표 등이 ‘친문(재인)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대거 탈당하면서 당이 쪼개졌다.
2016년 4·13 총선을 앞두고 위기에 직면한 그는 승부수를 던졌다. 2012년 대선 때 경쟁자인 박근혜 전 대통령 쪽에서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지낸 김종인 전 의원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영입하며 정면돌파를 시도했고, 총선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정계은퇴’까지 공언하며 공들인 호남에서 국민의당에 참패한 것은 정치적 부담이 됐다.
문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적폐 청산’과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약속하는 한편으론, “다름이 틀림으로 배척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두번째 대선 도전에 나선 그는 당 밖에서 불고 있는 반문연대 바람을 잠재우고, 반대편에 선 유권자를 설득해가면서 ‘과거’와 결별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받아들었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관련 영상] <한겨레TV> ‘더정치’
대학생 문재인(맨 왼쪽)과 지금의 부인 김정숙씨(왼쪽 둘째).
특전사 부대 동료와 함께한 모습. 맨 오른쪽이 문재인 후보.
변호사 개업 뒤 사무실에서 어머니와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참여정부 때 대통령 비서실장 직을 수행하던 시절.
청와대에서 물러난 뒤 경남 양산 시골집에서의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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