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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정당

국회 ‘1호 미투’의 외침…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등록 2018-03-28 09:58수정 2018-03-28 14:57

정치BAR_#미투에 후진적인 민의의 전당
일러스트 하재욱
일러스트 하재욱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부하 직원 성폭행 의혹이 보도된 지난 5일,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실에 근무하는 여성 비서관(5급)도 실명을 내걸고 자신이 당한 국회 내 성폭력을 고발했다. 같은 의원실의 상급 보좌관(4급)으로부터 3년여간 지속적이고 상습적인 성추행과 성희롱을 당했다는 고백이었다. 국회 직원들이 오가는 페이스북 익명게시판 ‘여의도 옆 대나무숲’(대나무숲)에서 이름 없는 한숨으로 머물던 고백이 처음 현실 공간으로 나온 것이었다. 국회의 1호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폭로였다.

국회에서 첫 고백이 터져나오자,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은 술렁였다. 권력의 한복판인 여의도가 금방이라도 미투 운동의 뜨거운 열기에 쓸려나갈 것처럼 긴장감이 감돌았다. 국회사무처와 각 정당은 부랴부랴 대책을 내놨다. “다음은 누구라더라”는 소문이 메신저를 타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퍼져나갈 때 정치권은 숨을 죽인 채 지켜봐야 했다.

거기까지였다. 문화예술계, 학계 등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고백들과 달리, 국회에서의 미투 고백은 ‘응답’받지 못했다. 제2, 제3의 미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상습 성추행 피해를 고백한 구성원을 향한 음해성 2차 가해들이 뒤따랐다. 정치권에서 줄줄이 쏟아진 미투 대책들에도 불구하고 막상 국회 안에 있는 피해자가 얻을 수 있는 도움은 없었다. 각계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의 성과를 제도화해야 할 곳이 국회지만, 정작 조직 내 성폭력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꼴이다. 여성 보좌진들로부터 “국회 내부 조직은 사회를 이끌기는커녕 최소한의 변화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원성이 터져나왔다.

확산되는 역풍, 혼자가 된 피해자

“국회에서 추가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요? 미투 운동 앞에 방관자가 되는 게 두려워 나섰지만, 의구심이 들어요.” 국회 내에서 처음 미투 고백에 나선 ㅈ씨는 27일 <한겨레>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싸움’은 예상한 것보다 힘에 부쳤다. 지난 5일 국회 민원게시판에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고백하는 글을 올린 뒤, 그의 업무는 반쯤 마비된 상태다. 수시로 문의해오는 기자들을 상대하거나, 경찰 조사와 국회사무처의 감사에 대비해 몇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자료를 정리하는 중이다. 그는 이날 서울 영등포경찰서에서 처음 조사를 받았다. 그나마 의원을 비롯한 의원실 식구들의 배려가 없었다면 사직서를 내고 준비했어야 할지 모른다.

그가 속한 국회 곳곳에서 “미투를 지지한다”는 말이 울려 퍼졌지만 정작 ㅈ씨는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다. 소문 빠른 동네에서, 2차 가해의 말들은 속사포처럼 회관을 돌아 그에게 와 박혔다.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보좌관 ㅎ씨의 반박 입장문에 기초한 소문들이었다. ㅎ씨는 ㅈ씨의 폭로 이틀 뒤인 7일 기자들에게 보낸 입장문에서 “같은 의원실에서 일하기 전 사귄 적이 있는 오직 단 한명만 빼고 모든 여직원에게 존댓말을 써왔다”고 해명했다. ㅈ씨와 남녀관계로 만난 사실이 있는 것처럼 적은 것이다. ㅈ씨는 “기억을 되짚어도 그에게 교제 중이라는 메시지를 준 적이 없다”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ㅈ씨가 그렇게 주장하거나 말거나 소문은 기정사실처럼 퍼졌다. “같이 해외여행도 다녀왔다더라”는 헛소문으로 번져 그에게 돌아오기도 했다. 그나마 2차 가해의 말들을 ㅈ씨에게 전해주고 다독여주는 여성 보좌진들의 격려가 작은 힘이었다.

‘집안 단속’부터 나서야 할 정당들이 서로를 헐뜯고 책임을 돌리는 데만 급급한 모습도 ㅈ씨에게 절망감을 안겼다. 안 전 지사에 이어 민병두 의원, 정봉주 전 의원 등의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자 자유한국당의 박순자 의원은 “우리 당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은 거의 터치, 그리고 술자리 합석에서 있었던 그런 일들 뭐 이런 거였지(민주당처럼 심한 성폭력은 아니었다)”라고 말해 성폭력 문제에 대한 부박한 의식을 드러냈다. 현재 ㅎ씨가 소속된 곳은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실이지만 성폭력 사건은 과거 ㅈ씨와 ㅎ씨가 민주당 의원실에 몸담았을 때 벌어진 것을 두고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는 기자들에게 “꼭 지적을 하고 싶은 것은 그 사건 자체는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서 있었던 사건이고 채이배 의원은 그런 잘못된 일이 있는 줄 모르고 채용한 부분”이라고 선을 긋기도 했다. ㅈ씨는 “꼭 누구를 벌하기보다 직장 내 성폭력이 일어나기 쉬운 국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봐달라고 호소해왔는데도, 다들 면피에만 급급한 모습이 실망스러웠다”고 말했다.

성폭력 대처 지침도 없어…우왕좌왕 국회

그의 고백 이후 국회의 대처를 보면, 한국 사회의 성폭력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야 할 국회가 얼마나 조직 내 성폭력 문제에 무방비했는지도 드러난다. ㅈ씨의 폭로 이튿날인 6일 채이배 의원은 신속히 ㅎ씨에 대한 면직처리 방침을 밝혔다.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임을 고려하면 올바른 대처다.

하지만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ㅎ씨의 면직 처분은 아직 보류 중이다. 국회사무처 쪽은 이에 대해 “감사 절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통상 공직사회에서 성폭력이 일어나면 조사 절차가 마무리되기까지 ‘대기발령’을 내는 등의 방식으로 가해자를 분리하지만, ㅎ씨는 출근을 하지 않고 있을 뿐 여전히 신분상의 제약이 없는 상태다. 일반직 공무원과 달리, 의원이 임면권을 가진 별정직 공무원인 보좌진에게는 이 경우 명확한 처리 규정이 없어서다. 국회가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처리해본 적이 없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감사에 착수해야 할 국회사무처 감사관실 역시 성비위 사건을 조사할 인력이 없어 외부 전문가의 조력을 받는 형태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감사관실은 ㅈ씨의 동의를 구해 경찰 조사에 공을 넘긴 상태다. 그러면서도 감사 진행상황을 묻는 <한겨레>의 질문에는 “현재 조사가 진행중”이라고만 답했다. ㅈ씨는 “어려운 상황이 거듭되고 있지만 나중에 올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안 될 것 같다. 끝까지 싸워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얼어붙은 국회 미투 “여자는 뽑지 말자”

국회라는 철옹성을 뚫고 처음 터져나온 고백이 환영받지 못하자, 여성 보좌진들은 침묵에 잠긴 상태다. 점점이 이어지던 대나무숲 속 익명의 독백들조차 뚝 끊겼다. 한 여성 비서(7급)는 “미투 폭로 뒤 피해자의 행실 등에 대해 품평하는 찌라시(정보지)가 빛의 속도로 떠도는 걸 매일 보는데 누가 나설 수 있겠냐”며 “아주 잠깐 국회도 긴장하는 것 같았지만 벌써 ‘언제 미투가 있었나’ 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또다른 여성 비서(6급)는 “처음 대나무숲에서 말들이 나올 때만 해도, ‘잘릴 사람 많겠네, 드디어 국회에서도 시작되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안희정 사건 등이 터지고) 예상외로 사건이 크게 전개되면서, 우리가 (폭로하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보게 됐다”고 전했다.

성폭력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여성을 배제하는 ‘펜스룰’도 공공연하다. 한 여성 비서관(5급)은 “어느 남성 의원이 보좌진들에게 ‘우리도 이제 여자 뽑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식사 때 남성 보좌관들이 ‘(여자 빼고) 우리끼리 가자’고 하는 건 셀 수도 없다”고 전했다. 6급 여성 비서는 “예전에도 국회에서 주요 정보는 상급 남성 보좌관들과 의원 사이에 주로 오갔는데 앞으론 더욱 여성이 배제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폭력 문제를 자극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복수의 여성 보좌진들은 “ㅈ 비서관의 고백 뒤 ‘충격적인 성폭력 사례’를 알려달라는 언론의 요청 때문에 되레 입을 닫게 된 것 같다”고 토로했다.

미투 운동이 확산되자 국회와 정당이 앞다퉈 대책을 내놓았지만, 정책 당사자인 보좌진들의 신뢰를 받긴 어려워 보인다. 8일 국회는 보도자료를 내어 국회 내 인권전담기구인 인권센터를 설립한다고 홍보했다. 외부 전문가를 배치해 국회 내 성평등 교육과 성폭력 상담 업무 등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여야 교섭단체 3당 원내지도부 역시 취지에 공감하며 합의해 정치권 내 미투에 호응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하지만 정작 인권센터 설치를 위한 국회사무처 직제 개정안을 의결하기로 한 22일 운영위원회에선 개정안이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자유한국당이 “인력을 새로 뽑는 건 안 된다”며 비토했기 때문이다. 한 여성 비서는 “홍보만 하고 정작 통과가 되지 못한 걸 보니 의원님들에게 국회 내 성폭력은 다른 당을 공격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면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만 재확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 미투 운동의 직격타를 맞은 여당의 주요 성폭력 대책에 대해서도 보좌진들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민주당은 당 젠더폭력대책특별위원회 산하에 성폭력 신고센터를 설치하고 관련 제보를 수집해 조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3~6월 한시적으로 운영하기로 해 사실상 ‘지방선거용 검증센터’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민주당 소속의 한 8급 여성 비서는 “신고센터가 지방선거용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는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면서도 정작 사각지대에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다만 젠더폭력특위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신고센터에는 당내 보좌진과 관련한 신고도 1건 이상 접수되어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미투 ‘이어 말하기’ 그치지 않을 것”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가 그 어느 곳보다 미투 운동에 후진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보좌진이라는 직업과 국회의 구조적 특수성 때문이다. 각 의원실에선 의원 또는 상급 보좌관이 의원실 내 보좌진 9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의원실 자체가 하나의 소우주인 셈이다. 국회사무처라는 기관도, 당이라는 공조직도 개입하기 어려운 자기 완결성이 있다. 보좌진들은 “의원실 내 이야기는 방문턱을 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 의미에서 ‘당사자’들의 연대가 문제 해결의 열쇠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런 가운데 여성 보좌진들 스스로 ㅈ 비서관의 미투에 응답하는 성명을 낸 데서 그나마 작은 변화가 감지된다. 국회 내 여야 여성 보좌진 30여명의 연구모임인 ‘여성정책연구회’는 지난 19일 성명을 내어 “국회는 국민들의 대의기관인 만큼 앞서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야 국민 삶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국회 내부조직은 사회를 이끌기는커녕 최소한의 변화도 따라가지 못하는 도태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또 “국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보호하는 구조는 전무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피해자들의 직을 걸고, 삶을 건 용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며 “이 일을 계기로 우리는 뿌리 깊은 정치계의 성차별적 구조 개선을 위해 우리부터 노력하고 또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이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이보라 비서관(민주당)은 <한겨레>에 “국회 내 인권센터 설치도 의미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보좌진들이 안전한 공간에서 문제제기할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라며 “현재 발생한 피해사실에 대해 제대로 조사하고 징계를 요구할 수 있는 대책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투 운동에 대한 역공이 가해지는 지금이야말로 기로에 선 시기”라며 “정치 영역에서의 성차별적 구조가 시정될 때까지, 우리는 미투의 이어 말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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