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4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4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노동자유계약제’와 ‘노동조합 사회적 책임법’ 도입을 제안했다.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등 노동관계법의 입법 취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제안이다. 지난달 황교안 대표의 ‘외국인 차등 임금제 도입’ 발언에 이어 노동문제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비판이 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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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 시대는 점차 저물어” 나 원내대표는 연설에서 “점차 근로기준법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기준’의 시대에서 경제주체가 자율적으로 맺는 ‘계약’의 시대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근로계약을 개인과 개인의 거래로 취급하자는 뜻이다. 나 원내대표는 또 “국민들에게 마음껏 일할 자유를, 우리 산업에는 유연한 노동시장을 보장해야 한다”며 ‘일할 권리 보장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나 원내대표의 발언은 헌법이 보장한 노동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노동관계법은 노동자가 사용자에 견줘 사회적 약자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헌법 32조는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아무리 노동자와 사용자가 ‘합의’했다 하더라도, 노동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한 ‘근로기준법’에 어긋나면 고용계약은 무효가 된다.
나 원내대표는 이날 연설에서 노동법에 대한 이해 부족도 여실히 드러냈다. 노동관계법은 산업혁명 이후 ‘계약 자유의 원칙’이란 명분으로 기업주들이 열악한 일자리를 양산해 노동자의 생활조건이 바닥으로 치닫자 그에 대한 ‘반성’으로 만들어졌다.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장시간·저임금 노동에 시달리지 않도록 국가가 나서 노동조건을 세세히 규정한 것이다. 아동 노동을 금지하고 하루 8시간 노동을 정착시킨 것도 이때의 일이다.
노동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신인수 민주노총 법률원장은 “장시간 노동을 규제하고 노동조건에 대한 여러 안전장치를 마련한 근로기준법을 무력화하자는 뜻”이라며 “노동자의 처우를 18세기 산업혁명 시기로 되돌려놓자는 퇴행적이고 반역사적인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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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ILO 규약에도 위배 나 원내대표가 제안한 “노동조합 사회적 책임법”도 논란의 소지가 크다. 나 원내대표는 연설에서 “노조의 각종 사업, 내부 지배구조, 활동 등의 투명성·공익성 제고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노조의 사회적 책임법’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노조 활동이 적정선을 넘지 않도록 법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최근 정부가 비준을 추진하고 있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결사의 자유’를 규정한 핵심협약 87조는 “노동자단체·사용자단체는 공공기관의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롭게 대표자를 선출하며, 관리 및 활동을 조직하고 계획을 수립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더구나 국제노동기구는 노조 설립을 ‘신고제’가 아니라 ‘허가제’로 운영하는 현행 노동조합법과 시행령에 대해 여러 차례 수정 권고를 한 상황이다. 유럽연합(EU)도 최근 한국이 한-유럽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약속한 핵심협약 비준을 미루고 있다며 분쟁 해결 절차를 공식 추진하고 있다. 노조에 대한 행정관청의 개입 문제는 분쟁의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다.
나 원내대표는 연설에서 노조에 대한 뿌리 깊은 적대감도 드러냈다. 그는 문재인 정부를 “친노조, 반노동 정부”라고 규정했다. 문재인 정부가 ‘기득권 노조’에 휘둘려 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노동자의 권익을 외면하고 있다는 보수 언론의 오랜 주장을 반복한 것이다. 연설문 작성을 도운 한국당 관계자는 “국내에는 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미조직 노동자 비율이 더 높다. 친노조와 친노동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미조직 노동자에게 ‘노조 할 권리’를 보장하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의 노조 활동을 제약하는 방식으로 노동권의 ‘하향평준화’를 이루려는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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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파시스트적 발상” 이주호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자본을 견제·감시하는 노조의 특수한 역할이 있기 때문에 헌법이 노동 3권을 보장하고 있다. 나 원내대표의 주장은 노조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파시스트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논평을 내어 “나 원내대표의 주장은 ‘죽도록 일할 의무’와 ‘마음껏 해고할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발상을 드러낸다”며 “나 원내대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알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는 노동영역을 공연히 기웃거리지 말라”고 반발했다.
이지혜 정유경 조혜정 기자
godot@hani.co.kr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교섭단체 대표연설 가운데 기사 관련 부분 발췌
□ 근로기준의 시대에서 계약자유의 시대로 가야 합니다.
낡은 노동 법규의 개혁도 필요합니다.
신산업 등장과 시장 다변화에 따라
노동 패러다임도 급격히 변합니다.
휴식과 노동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노동법규는 4차 산업혁명에 맞는
노동시장 수요에도 부응해야 합니다.
고용 인프라로서의 노동법규가 요구됩니다.
그 동안 근로기준법의 틀 안에서
근로 제도 및 노동관계를 규정해왔습니다.
최저임금 인상, 주휴수당 개편, 주52시간 적용 등은
기존의 근로기준법 틀에서의 논쟁입니다.
하지만 점차 근로기준법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단일 기준으로 모든 근로 형태를
관리·조정할 수 없는 경제 시스템입니다.
새로운 산업 환경과 근로 형태에 맞는
‘노동자유계약법’도 근로기준법과 동시에 필요합니다.
국민들에게는 마음껏 일할 자유를,
우리 산업에는 유연한 노동 시장을 보장해야 합니다.
신규 일자리 창출, 바로 계약자유화에서 시작됩니다.
<일할권리보장법>으로 주52시간 피해를 최소화하고,
<쪼개기알바방지법>으로 주휴수당 부작용을 막겠습니다.
모든 국민의 일할 자유를 위한 법개정입니다.
이제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기준’의 시대에서
경제주체가 자율적으로 맺는 ‘계약’의 시대로 가야합니다.
그 자유 경제의 길을 자유한국당이 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