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0월1일 공군 주요 간부 4명이 공군 창군을 기념해 촬영한 모습. 왼쪽부터 이근석, 김정렬, 박범집, 장덕창. 공군 제공
최근 육군사관학교가 독립전쟁 영웅 홍범도·지청천·이범석·김좌진 장군과 이회영 선생, 박승환 대한제국군 참령 흉상을 교정에서 철거하거나 이전하겠다고 밝히면서, ‘국군의 기원이 어디인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육사의 정신적 토대를 광복군·독립군에서 찾아야 한다며 신흥무관학교를 ‘육사의 뿌리’로 본 지난 정부와 달리, 육사가 국방경비사관학교를 그 뿌리라고 주장하며 홍 장군 등의 흉상 이전·철거 근거로 삼은 탓이다.
국방경비사관학교는 미 군정 시기 일본군·만주군 출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곳이고, 육사는 국군 가운데 가장 먼저 창설된 육군의 장교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이에 이종찬 광복회장은 9월15일 “일제의 머슴을 하던 이들이(을) 국군의 원조라고 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비판했다.
육군은 1948년부터 1979년까지 30년이 넘도록 역대 육군참모총장이 모두 일본군 혹은 만주군 출신이었다. 해군과 공군의 사정은 어땠을까.
해군은 손원일 제독처럼 서양이나 중국, 일본 상선에 근무했던 항해사, 기관사, 통신사 등이 주도해 창설됐다. 일본 해군이 조선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일본 해군 경력자는 없었다. 이 때문에 해군은 역대 참모총장 가운데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 1명도 없다. 이를 두고 해군 장교들은 “클린 해군”이라고 부른다.
공군의 창군 과정은 ‘일제의 머슴’과 ‘클린’의 중간쯤인 하이브리드(혼합)다.
공군은 최용덕, 이영무, 장덕창, 박범집, 김정렬, 이근석, 김영환을 ‘공군 창설 7인의 간부’라고 부른다. 7인은 광복군·중국군(최용덕), 일본군(박범집·김정렬·이근석·김영환), 중국군(이영무), 일본 민항기 조종사(장덕창) 출신이었다. 섞이기 어려운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군 창설을 위해 함께 모인 것이다. “공통점을 구하고 차이점은 놔둔다”는 구동존이(求同存異)였다.
7인 모임을 이끈 좌장은 ‘공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최용덕 장군(1898~1969)이었다. 그는 일제에 맞서 무장독립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였다. 최 장군을 포함해 공군 창군의 염원을 품은 이들 7인은 매주 토요일 김정렬의 서울 돈암동 집에 모였다. 김정렬이 부잣집 장남이라 형편이 넉넉했기 때문이다. 초기 항공인들 가운데 돈암동 김정렬 집에서 밥 한끼 안 얻어 먹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들은 미 군정에 조선경비대 항공부대 창설을 요청했다. 1948년 미 군정은 항공부대 창설 조건으로 이들에게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이등병 신분으로 입교해 교육을 받으라고 요구했다. 당시 미 군정은 최용덕 장군 등 국내 항공계 지도자들이 과거 일본군 항공대나 중국 공군 출신이기 때문에 이들의 군 경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기초군사훈련을 다시 받으라고 한 것이었다.
베테랑 조종사였던 이들은 이런 미 군정의 요구가 치욕이라며 분노했다. 중국 공군 대령 출신인 최용덕 장군은 당시 50살이었다. 김정렬은 일본 육사를 나와 2차 대전 때 일본군 전투기 비행 중대장을 지냈다.
최용덕 장군의 제2대 공군참모총장 취임식 장면. 사진 공군박물관
하지만 7인 가운데 최선임이었던 최용덕 장군은 후배들을 이렇게 설득했다.
“우리가 500여명의 항공인들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이와 같은 미 군정 당국의 제의를 수락하여 항공부대가 창설만 된다면 병이면 어떠냐.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정신을 잘 이해한다면 우리가 이등병으로 입대하는 것도 뜻이 있지 않느냐?”
7인은 1948년 4월 조선경비대 보병학교 교육을 마쳤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다음날인 1948년 8월16일 최용덕 장군은 국방부 차관에 임명됐다. 최용덕 장군은 국군 조직을 새로 짜면서 국군조직법 부칙에 ‘육군에 속한 항공병은 필요한 때에 독립한 공군으로 조직할 수 있다’라는 조항을 넣어 공군 창설의 근거를 마련했다.
대한민국 공군은 1949년 10월1일 창설됐다. 10월1일은 국군의 날이자, 공군 창군 기념일이다. 정부 수립이후 1년 만에 육군에서 독립해 공군이 창설된 것은 당시 국내·외 상황을 감안하면 기적같은 일이다. 세계 최강인 미국 공군도 1947년 9월 미 육군에서 분리 독립했다. 1947년까지 미 공군은 미 육군 항공대로, 육군의 일부였다.
쉰살에 훈련병으로 다시 입대한 최용덕 장군의 백의종군이 발빠른 공군 창군의 든든한 밑돌이 된 것이다. 최용덕 장군이 자신들의 전력을 내세워 훈련병 입소를 거부했던 이들을 설득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공군은 196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쯤 육군에서 독립했을 것이다.
공군은 2019년 9월19일 김정렬 장군 서울 돈암동 집 터에 ‘대한민국 공군 창군 발상지’란 동판을 새겨, 화합과 단결의 모범을 보여준 선배들의 정신을 되새겼다. 공군 제공
최용덕 장군은 1956년 공군 중장으로 전역한 뒤 체신부 장관과 주중국 대사를 지냈고, 1969년 8월15일 광복절에 영면했다. 부하들을 챙기느라 일흔살까지 셋방살이를 면치 못했던 그는, 별세할 당시 전 재산이 손녀에게 우유를 사주고 남은 거스름돈 240원이었다고 전해진다.
최용덕 장군은 생전 공군 후배들에게 “우리의 살 곳도 하늘이요, 우리의 죽을 마당도 하늘이요, 우리의 일터도 하늘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임종을 며칠 앞두고 공군 후배들에게 “내가 죽거든 수의 대신 공군복을 입혀주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해방 후 일본군 출신이 국군 창설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국군에 일본군 출신들만으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군은 일본군 출신이 없는 ‘클린 해군’이었고 공군은 광복군 출신과 일본군 출신이 힘을 합쳐 세웠다. 공군은 2019년 9월19일 김정렬 장군 돈암동 집 터에 ‘대한민국 공군 창군 발상지’란 동판을 새겨, 화합과 단결의 모범을 보여준 선배들의 정신을 기렸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